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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당신들의 날

2019년 7월의 글

그날은 완벽한 휴일이었다. 자투리 행운을 모아서 여분의 하루를 만들어낸 것 같이 그랬다. 맑고 부드러운 햇빛이 사방에 넉넉해서 근처의 모든 사물이 덩달아 선명했다. 나는 K에게 살아있는 건 정말 끝내주는 일이라고 떠들어대며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 도착하자 때마침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길을 건너며 우리는 멀뚱히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그 건널목에서 여러 번 물을 먹었다. 거기는 항상 사람을 서두르게 하거나 오래 기다리게 하는 식으로 사람의 약을 바짝 올렸다. 애매한 타이밍에 보행 신호로 바뀌는 바람에 숨이 목 끝까지 차도록 달려야 했고 그게 분해서 저항의 의미로 뛰지 않으면 꼭 신호등 앞에 다다를 무렵 빨간불이 됐다. 그사이 높은 확률로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가버리고.


그날은 모든 것이 달랐다. 줄 끝에 서자마자 버스가 도착했다. 으레 만석이던 버스 안에 두 자리가, 그것도 나란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행선지까지 가면서 돌아오는 주의 일정표를 확인했는데 일이 취소되거나 건너뛰는 날이거나 미루어지는 식으로 고스란한 휴가가 주어졌고 그게 마침 K가 월차를 쓴 기간과 겹쳤다. 


K와 나는 완전히 흥분했다. 그래서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식당엘 가기로 했다. 대기 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보기로 작정을 했다. 식당이 있는 골목에 도착했을 때 두어 무리의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문턱을 넘으며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거짓말같이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 우리는 정치인이나 기업가, 저명한 학자와 같이 비교적 ‘중요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세상이 나를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거나 거절하지 않을 때의 행복감이나 누군가 나를 위해 기꺼이 길을 열어 자리를 주고 필요를 살피는 일의 황홀함에 대해서. 빳빳하게 다림질된 셔츠를 손 안에 쥐었을 때의 감촉과, 그게 행운이 아니라 매일로 주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문득 K에게 물었다. 매일매일 세상에게 환영받는 기분일 거 아니야. 그는 식전주를 아주 조금만 들이켜고는 답했다. 어쩌면 가끔씩만 불청객이 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건 그런 거니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세상의 비밀을 누설해버린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량조차 단번에 탔다. 이쯤 되니까 불안해지는데, K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를 마지막 1분까지 알뜰하게 즐기자고 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무지개 깃발을 든 사람들이 사거리를 가로질러 행진하고 있었다. 길의 이편에서부터 저편까지를 잇는 긴 행렬이었다. 한참 바깥을 내다보던 K는, 퀴어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작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나있었다. 걷는 동시에 춤추는 사람이 있었고 전체적으로 헐벗은 복장의 사람도 있었다. 화려한 색상의 가면, 뿔이 달린 머리띠 따위도 심심찮게 보였다. 어떤 사람은 신이 나서 깃발을 막 흔들다가 앞사람의 머리를 쳤는데 맞은 사람이 와 웃어서 때린 사람도 와 웃고 그보다 뒷줄의 어떤 사람은 걷다가 고꾸라질 뻔했으면서도 즐거워했다. 


모두는 웃느라 바빠서 설렁설렁 걸었다. 그날 그들은 기다리거나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길이와 너비 모두 넉넉한 대로가 그들의 것이었으며 행렬이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길목의 모든 신호는 파란불이었다. K와 나는 신호등 아래에서 키스하는 연인을 보았다. K와 나는 너무 유심히 보지 않으려 애썼다. 요즘은 누구나 아무데서고 키스를 하니까.


사실 그래도 자꾸만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날의 날씨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듯싶어서였다. 그들은 물론 수줍어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뻐보였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K와 나는 우리가 온종일 만끽했으나 예기치는 못했던 친절의 정체에 관해 얘기했다. 아마도 그들을 위해 준비된 몫의 일부를 나눠받았으리라고. 그러면 그걸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였다. 그날은 정말이지 완벽한 하루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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