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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사과에 관한 짧은 에세이

2019.05 월간에세이

기이하게 밝은 밤이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영사기에 걸린 필름처럼 빠르게 흘렀다. 오리온자리가 남서쪽 하늘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구름의 이동 방향 때문인지 인파를 거슬러 서두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과를 먹었다. 누군가 아는 분의 농장에서 받아왔다고 했다. 껍질을 깎아내기 아깝다면서 모두의 손에 사과 한 알씩을 쥐어줬다. 사과는 단단하고 물이 많았다. 앞니를 박아 넣자 과즙이 흘러 턱 끝에 맺혔는데, 입안에 단물이 고여 혀뿌리가 잠겼다. 예상외의 단맛에 혓바닥이 아팠다. 조금쯤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세잔의 그림에 나오는 사과도 이것만큼 맛있지는 않았을 거야, 누군가 말했다.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고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과즙이 묻어 끈끈해진 손가락을 핥고 있던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난 번 여행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단맛이라고 했다. 섹스를 해서 절정에 오르면 머릿속이 달다던 애였다. 


입안이 달았으므로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남자아이를 싫어했고 시끄러운 여자를 싫어했으나 시끄러운 여자의 범주에는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남자아이를 기르는 호들갑스러운 엄마를 싫어하기로 결정했고 남자아이가 자라서는 청소년이 되게 마련이므로 청소년도 싫었다. 같은 논리로 중년도 싫고 장년도 싫었다.


누군가는 교육받은 노인의 헛소리가 싫다고 했다. 다른 누군가가 왜 하필 그걸 싫어하느냐고 물었다. 헛소리는 누구나 다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자 그들이 SNS를 하지 않는 게 문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헛소리가 하고 싶어지면 책을 쓰고 강연회를 열고 현실을 바꾸려고 든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계보를 타고 올라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사람이 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거였다. 


내가 싫어하는 것 중에는 검은색 그렌저의 운전자도 있었다. 마땅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그러기로 정했기 때문에 싫어했다. 운전을 해서 마트엘 가던 길에, 갑자기 편견이라고 할 만한 것이 가지고 싶어졌었다. 마침 눈앞에 검은색 그렌저가 보였기 때문에 검은색 그렌저는 배려나 융통성이 없고 난폭 운전을 일삼는다고 믿기로 했다. 대충 지어낸 편견도 작동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실험을 시작한지 두 주 만에 나는 검은색 그렌저의 버릇없음에 대하여 가장 오랫동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검은색 그렌저는 아주 조금 차선을 빗겨 밟기만 해도 도로 위의 개새끼가 되었다. 같은 실수라도 흰색 아반떼나 은색 스타렉스나 군청색 티볼리에게는 관대하게 구는 스스로를 발견했으나 편견의 힘은 강력해서, 어느새 검은색 그렌저에 관한 억측에 진실이 담겼는지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그거 사실 진짜인 거 아냐? 누군가 말했다. 그때 너랑 사고 난 택시가 그렌저였다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차량의 신호 위반이었다. 충돌을 예감한 순간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종을 확인했다. 검은색 그렌저 HG320. 아, 그럴 줄 알았어, 생각하는 사이 앞범퍼가 박살났다. 여자였어?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늙은 남자였을 것 같은데,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추측했다. 막 소리 지르고 싸웠어? 


엄청 친절한, 어린 남자애였어. 내가 말했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고개부터 숙였다. 손님을 받으려다가 신호를 못 봤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언성을 높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내 쪽이 도리어 머쓱해졌다. 어린 택시 운전사라니,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우리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사과 더 먹을래?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은 여전히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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