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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세상은 느리게 변한다

2020년 2월의 글

설맞이 기념으로 엄마를 만나러 갔다. 세상 엄마들은 원래 다 그런가, 차로 고작 10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을 뿐인데도 현관문을 열면서 들어와, 잘 왔어, 길은 괜찮았어? 막히지 않았어?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나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기 시작했는데 그 눈빛이 흡사 매와 같아서… 아니, 말만 작년이고 우린 12월에도 만났는데.


곧이어 엄마는 묘한 얼굴을 했다. 두 눈이 갈 곳을 잃어 허공을 배회하고 입술은 동그랗게 옴츠러든 표정.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상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고 그렇지만 정말로, 정말로 말하고 싶으니 왜, 뭔데, 하고 물어봐달라는 뜻이다.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신년 인사인 셈 치기로 했다. 지금 나한테 잔소리하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엄마가 어깨를 옴찔 떨고는 배시시 웃었다.


한창 좋을 나이에 꼴이 그게 뭐냐는 거다. 피부며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거칠고 부스스하고 요즘 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어떻게 젊은 애가 자기 머리통에 난 새치를 그대로 방치할 수가 있으며 어째서 집에서도 안 입을 것같이 후줄근한 잠옷을 입고 왔느냐는 거다. 엄마를 만나러 올 때는 항상 단정하게 해서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거 잠옷 아니었어. 잠옷 아니었는데! 


순식간에 탈색약과 염색약이 등장했다. 세탁소 비닐도 여러 장 나왔다. 거기에 머리하고 팔이 들어가는 구멍을 뚫으니까 미용실 가운이 됐는데, 저세상 짬바라고 해야 할까… 한두 번 해서 나오는 품이 아니었다. 막내의 파랑색 머리도 엄마의 솜씨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그게 꽤 자랑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이런 것도 다 색깔 공부이고 세상 공부인데 요즘 어른들은 아이의 가능성을 망치려고만 든다고 막 되게… 자기는 어른 아닌 것처럼… 


때는 2004년 겨울.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딸의 가방에서 컬러로션과 챕스틱을 발견한 엄마는, 파운데이션도 아니고 비비크림도 아니고 틴트도 립스틱도 아니고 고작 컬러로션과 챕스틱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당장 세상이 끝날 것처럼 화를 냈다. 들킬까봐 몇 번 발라보지도 못했는데 그걸 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세상에!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하면서 내 등짝을 때렸다. 등짝도 때리고 팔뚝도 때리고 아무튼 때렸다고. 참고서 값 아니고 피씨방비 아껴서 산 건데 나를 막 쥐 잡듯이 잡았다고.


엄마 그거 기억 안 나?


라는 말을 목젖 깊숙이 밀어 넣으면서, 나는 세상이 느리게 변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보다 젊었던 엄마는 강철 같고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수틀리면 손이 막 나가고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법이 없었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냥 내뱉기는 미안하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주라는 의미의 표정을 지을 일도 없었고. 그랬던 사람이 자기의 세 딸이 자라는 동안에 변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게 본래 모습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세상은 느리게나마 변한다, 엄마가 변한 것처럼. 거기에 대고 요즘 유행은 그게 아닌데 왜 엄마는 딸한테 예쁠 것을 강요하느냐고 따진다든가, 꾸밈도 노동이고 뭐 염색약은 유방암 확률을 높이고 어쩌고 찬물을 끼얹어서 구태여 엄마의 인생에 피로를 더할 필요가 있겠냔 말이다. 당신께서는 이미 한번 자신의 의견을 바꾸었는데. 그래서 나는 뭔가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고… 엄마처럼 입술을 둥글게 오므렸다. 그렇지만 엄마는 내 머리를 만지느라 표정까지는 볼 새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쓴다. 


세상은 느리게 변한다. 다름 아닌 사랑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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