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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졔이 Aug 17. 2023

할아버지 나한테 왜 그랬어요

2020년 6월의 글

할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엄마와 나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할아버지를 규탄했다. 할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누가 봐도 길몽처럼 보이는 꿈을 연달아 꾸게 만들어서 우리를 헛된 기대에 사로잡히게 하다니. 미망에 빠트리다니!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


엄마가 갑자기 할아버지 편을 들었다. 괜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면서, 혹시 면접에서 뭐 실수한 건 없느냔 거다. 듣자니까 슬슬 성질이 나서, 엄마는 내리사랑을 모른다고 소리를 빽 질렀다. 


엄마는 좀처럼 져주는 법이 없다. 나를 한참 흘겨보더니 그러니까 애꿎게 회사를 다니려고 들 게 아니지! 할아버진 네가 계속 글을 썼으면 싶어서 그러셨나보지! 라고 말했다. 내가 진짜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 엄마는 확실히 내리사랑을 모른다.




이제 충분히 시간이 지났으니까 말해도 된다. 


작년에 꿈을 꿨다. 오래 전에 작고한 외할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의 할아버지는 정정했는데,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뵌 장소가 병원이어서 그랬는지 꿈속에서도 서울아산병원에 살았다. 


초대장이 왔던가, 전화가 왔던가. 병원 1층 로비에서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열린다고 했다. 무슨 장례식을 지금 여느냐고 여쭈니까, 그게 당신의 뜻이라고 했다. 늦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싶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싶다고. 


원체 성정이 깔끔한 분이었다. 나는 그게 꿈인 줄도 모르고 마냥 납득했다. 꽃을 샀는데, 백합을 살까 국화를 살까 하다가 퍼뜩 놀랐다. 결국에는 흰 바탕에 분홍물이 든 카네이션을 골랐다.


회장 중앙에,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영정 사진과 국화다발이 놓여야 할 곳에 기다란 잔칫상이 마련되었다. 거기가 할아버지 자리였다. 잔칫상 앞쪽으로는 결혼식 피로연을 열 때처럼 원탁 여러 개가 놓였는데, 테이블마다 사람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옅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서 방문객을 반겼다. 당신께 꽃다발을 전하자, 그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나를 한참 굽어보았다. 할아버지 키가 그렇게 컸나? 모르겠다. 아마도 어릴 적의 내가 기억하는 눈높이가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 할아버지는, 네가 그래도 내 비문을 적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음을 터트렸는데… 


너무 심하게 우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베개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꺽꺽대면서 숨을 쉬었다. 가슴이 아팠다. 모든 기회가 이제는 다 지나가버렸다는 게 아깝고, 할아버지가 이제야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잘 모르겠다, 왜 눈물이 났을까? 나는 외가에 전화를 걸었다.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알았다. 할아버지 기일과 내 생일이 같은 날이라고 했다. 생전에 나를 많이 아끼던 분이라고 했다. 그 말이 별로 믿기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기쁘긴 했다. 




얼마 뒤에 또 꿈을 꿨다. 친구 두 명하고 산행을 갔다. 정상에 원통형의 관망대 건물이 있고 거기서부터 산 아래까지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연구소가 줄지은 곳이었다. 아마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친구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기왕에 왔으니 관망대까지 올라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버스를 타자고 제안했다. 버스가 산을 오르는 동안 창밖 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고 그대로 마을까지 내려가면 힘도 들지 않으니 좋겠다고.  


마침 버스가 왔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사방이 어두워졌다. 하늘이 찢길 듯이 울고 번개가 세 번이나 쳤다. 공중에 벼락의 잔가지가 선명했다. 장대비가 내렸다. 산중턱까지 물이 차면서 버스에도 빗물이 들이쳤다. 발목부터 서서히 잠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허리께까지 올라왔다.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와, 물이 진짜 맑네, 깨끗하고 시원하네, 생각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너무 기복신앙에 가까워지는데, 그래도 이게 사실이니까 그대로 쓴다. 그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면접 제의를 받았는데, 무척 좋은 회사였다. 무엇보다 업무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부터 관심이 있던 분야인 데다 승진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나는 대단히 흥분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한참 내 얘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정장은 있니? 일단 면접 보고 와. 다 끝나고 나서 얘기해줄게, 그랬다. 


엄마도 꿈을 꿨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집에 찾아오셨는데, 아니, 산에서 만났다고 했나. 아무튼 외할아버지를 꿈에서 뵈었는데, 할아버지가 자루를 하나 건네줬다고 했다. 입구가 꽁꽁 묶인 커다란 마대자루였다. 안에서 뭐가 엎치락뒤치락 하더란다. 할아버지가 신신당부했다. 안에 굵직한 독사 두 마리가 들었다면서 물리면 큰일이니까 간수를 잘하라고 했다. 엄마는 진짜로 겁을 먹었다. 너무 무서워서 간신히 자루를 받아들었다. 


마침 내가 이력서를 넣은 회사는 쌍용이었고.


우리는 꿈 얘기를 하면서 진짜로 엄청나게 흥분했다. 나는 호기롭게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 십만원 어치를 사고 집에서 깨소금을 볶던 엄마는 내가 사온 소고기를 전부 육회로 만들었다. 그날 엄마와 엄마의 모든 가족이 배가 터질 때까지 육회를 먹고 엄마, 기다려 내가 딱 효도를 할라니까! 어이구,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지, 네가 행복한 게 제일이지… 그래서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나 봐, 그렇지, 맞아, 정말 그런가봐 하면서 막 서로 손을 부여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방방 뛰고 하여간에 온갖 난리를 다 부렸다. 우리는 철석같이 할아버지를 믿었다. 


일주일 뒤에, 탈락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할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한 할아버지가 그집 뒷동산에 올라가 농성을 했더라는 이야기도 해줬다. 나는 요즘 사람답게 할머니의 의사도 궁금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싫어했대? 싫었는데 억지로 결혼하신 거래?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사과를 건네주면서 씩 웃는 모습을 보고 반했는데 그게 새하얗고 고른 치아 때문이었으니까 젊을 적부터 치과를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단정한 분이었는데, 엄마는 말했다. 우리 씻겨서 학교 보내는 것도 전부 할아버지가 했어. 퇴근하면 우리를 전부 불러서 대청에 앉혀놓고 손톱 발톱 검사하고, 그날 입었던 작업복 빨아서 널고. 나는 세상 남자가 다 우리 아빠 같은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너무 나중에 알았어,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어디서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 자연스럽게 나의 시작도 포함되는 이야기.


우리는 한참 동안 이 세상에 없는 것들만 가지고 대화했다. 마치 사랑이 아직 여기에 있고 우정이나 신뢰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처럼, 그이가 아직도 여기에 있을 것처럼. 아직도 우리를 살펴보고 있을 것처럼. 한참을 그랬다.


엄마는 문득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나도 그랬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그리운 건 처음이어서, 나는 잠깐 동안, 인간이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이유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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