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 데미안

작성일 2021.05.12

by 제로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p.8


데미안을 세 번째 만났다. 마음에 드는 책이나 영화 등을 반복해서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데미안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여러 번 읽게 될 줄 몰랐는데 독서모임의 단골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酒객전도 리스트에도 들어갔다. 이번에는 위문장이 남았다.





첫 만남,


누구나 아는 이 구절을 친구가 편지에 적어주어서 처음 책을 펼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p.137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도 어려웠고 상당히 철학적이었다. 완독을 하는데 집중했고,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에 그쳤다. 완벽주의 강박이 심했던 시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가 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해보라며 나의 틀을 깨보라는 조언을 듣곤 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처럼 들렸다. 딱 그 정도.




두 번째 만남,


책에 큰 흔적이 없었다. 처음과 두 번째 사이의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터였다.




그리고 세 번째,


가장 많은 페이지가 접혔다.

책을 읽을 때 흐름이 끊기는 것을 싫어해 일단 기억에 남거나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은 책 귀퉁이를 접어두는 버릇이 있는데, 어떤 내용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많이 접혔다. 이럴 땐 접힌 페이지에 기억에 남는 문장을 밑줄 치곤 밑줄이 없는 페이지는 다시 편다. 그렇게 앞서 인용한 서문을 포함해 몇 가지 생각이 모였다.



아브락사스는 '모순적인 인간의 내면'

싱클레어는 선과 악의 세계를 경험한다. 정확히는 두 세계가 확실히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있고 종교가 있고 정돈되어 안전한 ‘선의 세계,' 그리고 하인들이 살고 추한 소문이 돌고 거친 ‘악의 세계.’ 두 세계는 달랐지만 가깝게 닿아 있다. 그러다 데미안을 만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으며 마음속 비판적인 생각이 꿈틀거린다. 우리가 ‘악’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 ‘악’일까? 성서에 나온 것일지라도 우리가 아는 그대로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며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신을 숭배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인정해야 해. 우리는 신께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해야 해. 그래야 옳다고 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묵살하지 않도록 악마까지도 품어내는 그런 신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p. 92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추구해야 할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책에서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 역할을 하는 일종의 신의 이름'으로 제시된다.


나는 아브락사스가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간 본연의 자아’일 것이라 이해했다. 모순적인 인간의 내면 말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을, 모든 생각을,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자아는 선과 악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단단해진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끊임없이 ‘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아를 찾는 것은 일생에서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며 관찰하고 질문해야 함을 말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 여정은 나의 ‘아브락사스’를 되돌아보게 했다.


한창 나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시절, 나의 어떤 모습은 옳고 어떤 모습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떤 면들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라도 나를 인정하자. 나의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자.’

솔직히 이 말을 잘 지키고 있다고 확신하진 못하겠다. 가끔은 마주하기 싫은 내 내면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노력 중이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때면 놀랄 때도 있지만, 나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 본인'이 아니었을까?


어린 싱클레어,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겠지.
(...)
그럴 때 너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p.254


이 결말을 보고 나는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임을, 즉 '같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세계를 확연히 구분하며 선의 세계로 가려고 노력하는 ‘싱클레어,' 악이 '악'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하며 끊임없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미안.’ 어떤 때는 한없이 고분고분한 ‘나’인데 비판적인 생각이 불쑥 찾아들고, 스스로 가치판단을 내리며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싱클레어도 내면의 데미안과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운 좋게도 우리와 똑닮은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도 해보았다. 싱클레어(Sinclair)와 데미안(Demian)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Sinclair는 ‘순수한, 신성한'이라는 의미이고, Demian은 ‘제압, 길들이기’라는 의미였다. Sinclair로 ‘선,' Demian으로 ‘악’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추측일 뿐이지만,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한 소년의 자전적인 성장 스토리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데미안과 살아간다. 아직 만나지 못했을 수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누군가일 수도, 자신의 내면일 수도 있다.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하는 데미안과 대화하며 성장한다. 그렇게 자신의 알을 깨어 세상과 마주하며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나는 ‘내면의 데미안’을 거의 매일 마주하고 있다. 싱클레어처럼 가끔은 불편해서 피하기도 하고 가끔은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볼 시간을 잊어버렸다면, 당장 책 <데미안>과 만나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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