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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전주까지, 움직이는 마음

환대받는 어른이 되는 법

by 성장썰


산티아고 순례길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배운 장면이 있다. 오십을 훌쩍 넘긴 두 어른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했다. “여기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뭘까를 먼저 생각해요.” 한 사람은 김치찌개를 끓였고, 다른 한 사람은 씻은 그릇을 말렸다. 오랜만에 고향의 향기에 사람들은 행복해했고, 젖은 접시마다 햇빛이 번들거렸다. 가만히 있지 않고 공동체의 빈칸을 찾아 재빨리 채우는 몸 덕분이었다.


이번 여름, 엄마와 전주 외가로 3박 4일 내려갔다. 외가는 7남매, 그중 여섯이 여자다. 모이면 북적이고 말이 많다. 화제는 결혼과 종교로 곧잘 미끄러진다. 나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결혼은 천천히 할 거니 잔소리 말아라. 종교도 내가 알아서 가고 싶으면 갈 거다.” 다행히 어른들은 고집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내가 싫은 기색을 보이면 주제를 돌린다. 마음에 남을 말이 있어도 밥숟가락 소리와 웃음에 묻혀 흩어진다.


이번에 내 몫은 ‘요즘 애’였다. “물 좀.” 하면 재빨리 컵을 채우고, 관광지에서는 팔등신으로 예쁘게 사진을 찍어 드렸다. 갓난아기였던 손녀 사진에 머물러 있던 휴대폰 배경화면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근 사진으로 바꿔 드렸다. 보고 싶은 야구 경기는 TV와 휴대폰을 연결해 틀었다. 사소하지만 귀찮은 일,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모두가 편해지는 일이다. 나는 그 작은 손발이 되었고, 대신 삼시 세 끼를 꼬박 얻어먹었다.


밥상이 풍성했던 건 엄마의 준비 덕이다. 내려가기 전, 반찬을 부지런히 담가 한 소쿠리 챙겼다.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를 열고 접시를 꺼내 차렸다. 다양한 김치의 새콤함과 뚝딱 끓인 된장찌개가 상을 채웠다.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 환대를 일상의 노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우리 집에는 있었다.


경기도 여주의 여백서원도 떠오른다. 괴테를 전공한 노교수가 정성스레 가꾼 정원과 서원을 누구에게나 열어 둔다. “와서 쉬다 가세요.”라는 마음이 미소에 배어 있다. 공간을 여는 일, 손을 많이 쓰는 일, 그것이 곧 철학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뿐이 아니라 엉덩이도 가벼운 사람, 공동체의 빈칸을 보면 먼저 메우는 사람. 도움이 되려면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아야 한다. 괜히 서두르면 민폐다. 그러니 나의 도구는 기술과 성실이다. 휴대폰을 다루는 감각, 움직임을 아끼지 않는 몸, 필요한 부분을 알아채는 눈을 기른다.


환대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는 먼저 움직인다. 다음 외가 방문에도 나는 또 ‘요즘 애’로 일어날 것이다. 물을 따르고, 화면을 바꾸고, 경기를 틀어 드린다. 엄마는 반찬을 더하고, 어른들은 웃음을 더한다. 내쫓김이 아니라 환대받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 그렇게 각자의 일을 갖춘 밥상처럼,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함께 차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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