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나와 단단해진 나

나이 듦에 대하여

by 성장썰

얼마 전 발표가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전날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마지막 슬라이드를 열 번은 다시 보고,

문장 하나를 고치고 또 고쳤을 것이다.

“이게 최선일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새벽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이번의 나는 밤새지 않고, 열두 시 전에 잠들었다.

노트북을 덮으면서 잠깐 망설였다.

이 정도만 준비해도 괜찮을까.

내가 예전보다 무뎌진 건 아닐까.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고 말해왔지만,

가끔은 이렇게 흔들린다.

어릴 적부터 나이 든 사람들의 연륜이 부러웠다.

시간만 흐른 것이 아니라, 인생의 풍파를 지나오며 생긴 단단함.

당황할 법한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태도.

거절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싸워야 할 때는 정확히 싸울 줄 아는 힘.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지 아는 사람.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불과 십 년 전, 대학생이던 나는 뜨거웠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지금 이 자리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인도 여행을 가고, 아카데미를 찾아다니고,

밤새 팀플을 준비했다.

“잘해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움직이는 연료였다.

그 시절의 나는 참 열심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했다.

조금만 부족해도 내 존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발표 하나, 피드백 한 마디에

내 능력 전체가 평가받는 것처럼 느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 나는 밤을 새워 일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고,

한 번의 실수가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초연해진 건 아니다.

발표를 마치고 나오는 길,

“예전보다 에너지가 덜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스쳤다.

예전의 나는 더 치열했고,

더 많이 쏟아부었고,

어쩌면 더 날카로웠다.

지금의 나는 여유롭다.

결과에 덜 얽매이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게 성장일까.

아니면 둔해진 걸까.

나는 아직도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제 나를 덜 미워한다는 것이다.

칭찬을 들으면 괜히 부정하지 않는다.

“네, 저는 이걸 잘합니다.”라고 말해본다.

부족하다는 지적이 오면 속이 쓰리지만,

“그래, 고쳐나가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날 선 말에는 여전히 상처받는다.

누군가 공격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말을 오래 품지는 않는다.

상대의 불안이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상처를 덜 받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를 보호하는 기술을 익히는 중이다.

그 덕분일까.

요즘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달라졌다.

행복한 순간들,

사람들의 따뜻한 말투,

조용한 배려들.

불안한 시대라고들 말한다.

저성장, 양극화, 전망 없는 미래.

나 역시 그 현실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성실하고 다정한 이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나를 살만하게 만든다.

어쩌면 내가 조금 덜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더 잘 알아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호기심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전의 나는 세상을 향해 달려갔고,

지금의 나는 서서히 걸어간다.

가끔은 뛰고 싶고,

가끔은 멈춰 서고 싶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도 분명한 건 있다.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뜨거웠던 나도 사랑하지만,

지금처럼 조금 단단해진 나도 좋다.

완성된 어른은 아니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이 과정이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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