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중에서.
나는 책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공간을 싫어하는 정적인 사람이다.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며,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무심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러운 밥을 차려준다거나 상대에게 어울릴만한 좋은 선물을 고르는 일이 늘 어려운 사람이다.
혼자일 때의 나는 생각과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미리 걱정하는 일들도 많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해 한밤에 여러차례 깨어 뒤척이는 사람. 눈물이 많아 부끄러운 사람.
평상시의 나는 평온한 사람이다.
쉽게 화가 나거나 흥분하지 못하며, 부당한 일을 겪고도 세련되게 항의하거나 따지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하다.
가끔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다.
누가 뭐래도 하고싶은 일은 결국 해야하는 사람이며, 사소한 일에 상처받기도 하고 아주 작은 일들에 의미부여를 하고 마음에서 놓지를 못한다.
관계에 있어서 냉정하고 차가울 때의 나도 있다.
한번 마음이 떠난 일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결정한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내 마음이 닫힌 일이나 관계,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추억이 담긴 오래된 물건을 어느날 문득 버리고, 인연을 정리하기도 한다.
내 안에는 아직 어린아이가 산다.
여전히 내 소원은 하늘을 나는 것, 평생 존경하는 인물은 피터팬, 이상형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하울이다. 스누피를 모으고, 마음이 산란할 때면 문방구에 가서 펜이나 노트를 산다.
그런데 어른으로 살고 있다.
어른의 역할을 하고, 어른의 일을 한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겉으로는 잘해내는 척, 괜찮은 척 하며 살아간다.
***
무엇이 진짜일까. 섬세했다가도 무심하고, 따뜻하다가도 차가우며, 어른스럽다가도 철이 없고 진지하다가도 엉뚱한 나라는 사람.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그 중에서, '우주에서 나에게 맡겨진 유일한 배역'은 어느 것일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