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지을 수 있는 일상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by 선경

“아~~~”


가뜩이나 업무에 지친 퇴근길에 갑자기 거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도 있었고 비도 싫어하지 않지만, 장대비가 그친 후의 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양말과 바지는 흠뻑 젖었고, 구두 안까지 진흙이 들어가 버렸다. 일적으로 불쾌한 일까지 있어 이 모든 상한 기분을 끌어모아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초라해진 몸을 이끌고 집 근처 슈퍼에 우선 다다랐다. 마침 배도 아픈데 집에 화장지가 떨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래는 안락한 집 안으로 바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고 싶지 않았다.


주변엔 어린 여자아이가 가늘어진 가랑비를 맞으면서도 첨벙첨벙 뛰어놀고 있다. 나의 몸은 만신창이고 우산은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보면서 짜증이 조금씩 풀렸다. 슈퍼 안에 들어가 화장지 세트를 골라 계산하려고 하는데, 그 꼬마가 턱 하니 계산대 의자에 앉았다. 아마 이 꼬마가 기특하게도 주인 할머니를 돕고 있는 손녀인 듯 보였다. 뭐 어쨌든 얼른 산 후 집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이거 살 거야?"

꼬마는 대뜸 나에게 반말로 묻는다.


"어…. 이거 살 거예요."


오히려 내 쪽에서 꼬마에게 존댓말을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바코드를 찍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는 은근히 독촉하는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는데 꼬마가 곧 한마디 던졌다.

"휴대전화 좀 빌려줄래?"

황당한 요청에 내가 잠시 멈칫거리자, 꼬마가 덧붙여 말한다.

"얼마인지 할머니한테 물어봐야 해."

꼬마가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보는데 주인아주머니와 연락이 안 되는지 통 말이 없다. 그 사이 아이의 생김새가 뚜렷이 보이는데 머리는 길고 눈은 양쪽으로 좀 찢어졌으나 코 매무새가 뚜렷해 아역배우같이 귀엽게 생겼다. 특히 목소리가 힘이 있고 계속해서 다양한 표정을 지어 흥미로웠다.

"안 받네. 음……. 이거 가질래?"

손가락으로 뜬금없이 담배를 가리킨다. 내가 담배 피게 생겼나보다.ㅜ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난 담배를 안 피우는데 어쩐다? 부러진 우산처럼 망가졌던 내 마음은 어느새 어린 꼬마의 당돌함을 귀엽게 여기고 있었다.

"근데 돈은 줘야 해.”


비 맞은 내가 불쌍해 보이지도 않은지 오히려 나와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느낌마저 든다. 내 눈에 바코드 기계에 찍힌 금액이 보였다.

“네가 9,900원을 받으면 될 거 같다.”

“그래? 그 돈을 받으면 되나?”


“어. 여기 만원. 백 원 거슬러 줄래?"

꼬마는 백 원을 거슬러 주고는 뿌듯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의 잘가(끝까지 반말ㅜㅜ)라는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서는데, 어느덧 비에 젖어 축축하게 지쳐버린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음을 느낀다. 귀여운 아이의 미소에 짜증은 다 말라버리고 마음이 뽀송뽀송했다. 힘겨운 날이라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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