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혜진이 폐백실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왔다. 벽을 따라 놓인 옷걸이엔 한복이 색깔별로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상쾌한 옷 향이 풍겼다.
‘새로 세탁해 둔 게 있었는데…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다.’
혜진이 고른 것은 빨강 바탕이 소매로 갈수록 분홍으로 바뀌는 화사한 저고리였다. 그녀는 저고리를 덮고 있던 얇은 비닐을 뜯었다. 비닐을 개어 구석에 정리하고 옷고름에 걸린 세탁 표식도 제거했다. 저고리를 들고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른 저녁이었다. 혜진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으셨어요?”
“네, 지금 나갈게요.”
혜진은 옆에 있던 연노랑 치마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마루 위에는 폐백실 직원이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혜진은 마루 아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걸어갔다.
[“이걸로 입어 보세요.”]
외국인 소녀 둘이 서 있었다. 한 소녀는 잔 꽃무늬가 그려진 풍성한 한복 치마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손에 혜진이 건네는 저고리를 받았다. 다른 한 명은 혜진이 건넨 연노랑 한복 치마를 받았다.
[“이 색 예쁘다.”]
그녀는 치마에 달린 어깨끈에 팔을 끼워 넣고 앞에 있던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혜진이 말했다.
[“이게 더 낫네요. 아까는 짧아서 발목이 보였는데, 이 치마가 더 숙녀처럼 보여요.”]
[“숙녀… 히히히.”]
두 소녀가 서로를 보고 웃었다. 혜진은 능숙한 손길로 둘의 한복을 입는 것을 도왔다.
[“자, 다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나 좀 봐봐. 공주님 같지? 나는 오늘 이 옷을 입고 숙녀처럼 걸을 거야.”]
[“공주마마, 내가 사진 찍어줄게.”]
그들은 즐겁게 웃으며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어주었다.
[“치마에 저 자수는 뭐예요?”]
한 명이 노란 치마에 놓인 초록색 자수를 보고 물었다.
[“이건 나비 같고, 옆에 이 동그란 건…”]
[“수박인가?”]
[“수박?”]
[“네, 수박이에요.”]
혜진이 대답했다.
[“왜 수박을 자수로 놓았어요? 수박이 특별한가요?”]
[“수박은 한국어로 읽었을 때, 그 소리에 복을 기원한다는 뜻이 있어요. 씨가 많은 것이 자손이 번성하라는 의미도 있고요. 성공하라는 의미의 자수예요.”]
[“수박이 한국말로 뭔데요?”]
“수박”
“쑤-빡?”
“수, 박.”
“수우, 퐉.”
[“헤이, 조심해. 너는 숙녀란 걸 기억해야지. 크크크”]
[“미안. 내 잘못이야.”]
둘이 또 웃었다. 소녀가 노란 치맛자락을 거울 앞에서 펄럭거렸다.
[“번성하라는 의미래.”]
[“나 이거 마음에 들어.”]
“여사님, 사진 나왔습니다.”
직원이 혜진에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넸다. 먼저 사진을 찍던 이들이 마루에서 내려가자 두 소녀가 물었다.
[“저희 차례인가요?”]
[“네. 올라가세요.”]
그들이 올라가 자세를 잡는 동안, 혜진은 방금 나온 사진을 메모판에 올렸다. 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관광객들이 사진을 찾으러 왔다. 나온 사진을 보고 그들이 말했다.
[“멋져요.”]
[“정말 예쁘다.”]
한 관광객이 메모판 한쪽에 붙어 있던 그림을 발견했다.
[“오, 예쁜 그림이네요.”]
[“그러네.”]
[“인쇄한 것 같지 않고, 누군가가 그린 것 같아. 이거, 그린 건가요?”]
[“네.”]
혜진이 대답했다.
[“한국은 아닌 것 같은데. 헤이, 어디인 것 같아?”]
[“음…글쎄, 몰라. 이런 곳은 유럽에 많지. 오, 너무 배고파. 식사하러 가자.”]
[“그래, 가자. 안녕히 계세요.”]
그들은 인사하며 밖으로 나갔다. 혜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함께 인사했다. 그녀는 또 시간을 확인했다. 직원이 책상으로 걸어와 서랍에서 새 필름을 꺼냈다.
“벌써 한 팩 다 썼어요. 오늘 사람이 많네요.”
“그러네요.”
“아까 그 외국인들도 그림이 예쁘다고 했죠?”
“아…네.”
“보는 눈은 똑같은가 봐요. 너무 잘 그리셨어요.”
“하하… 아니에요.”
“누가 가지러 오기로 했다고요?”
“…네.”
“그래서 아직도 안 가신 거예요? 제가 전해 줄게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세요.”
“그래도…”
“아드님이 기다리시겠어요.”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 위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두 소녀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직원은 책상 옆에 있던 버튼을 눌렀다. 폐백실 바깥에 달린 조그만 유리 등이 꺼졌다.
“끝날 시간 지났으니까요. 저분들이 마지막이고 청소만 하면 돼요. 여사님도 가세요.”
“…네, 고마워요.”
“뭘요.”
직원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마루로 올라갔다. 혜진은 폐백실 밖을 보았다. 유리 벽 밖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대리석 계단과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도 조용했다. 혜진은 창고로 들어가 외투를 입고 나왔다. 직원과 인사하고 그녀는 폐백실을 나왔다. 혜진은 대리석 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혹시 어디선가 들려올지 모르는 구두 소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그녀를 향한 그 어떤 소리도 부름도 없었다. 계단을 다 오른 그녀가 건물 바깥 거리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많았다. 어둑한 하늘 아래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혜진은 뒤돌아 계단 아래를 잠시 보았다. 저 안 어딘가를 희미하게 밝히던 작은 불빛이 또 하나 꺼졌다.
‘진짜 올 거라고 생각했다니…”
혜진이 길을 나섰다. 차가운 저녁 바람이 그녀의 외투 속을 파고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녀는 부지런히 걸었다. 발아래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를 닮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거운 어둠이 덮은 거리를 밝히려 애쓰는 것은 가로등 몇 개뿐이었다. 매끈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마른 가로수와 높이 뻗은 높은 건물들 모두가 회색빛이었다. 하늘마저 회색 구름이 가득했다. 달도 깊게 숨은 밤, 건물에 매달린 전광판 위에만 번쩍거리는 색깔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화면 아래에 자막이 하나 지나갔다.
<부산국제영화제 성공적인 폐막식>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그리웠던 사람을 만난 듯,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로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눈을 시리게 하는 조명이 화면 속에서 계속 터졌다.
<로알드, 배우상 수상>
건장한 체격의 남자 외국인이 깡마른 남자 외국인에게 상을 건넸다. 상을 받은 외국인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소감을 말했다. 관람석에 앉아 있던 어여쁜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다. 무대 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심사위원장 앤디 코넬,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히 할 것이라 전해>
그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맨 구석인 것 같지만 특별한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그와 함께할 자격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더없이 빛나고 화려한 모습으로.
늦은 밤, 아파트 주차장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들어갔다. 지애는 혜진의 동 앞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풀며 혜진이 말했다.
“고마워. 오늘 너무 고생했어.”
“아니야…”
혜진은 뒷자리에 있던 종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안에는 승우가 신병 훈련소 안에 가져갈 수 없어 놓고 간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지애가 물었다.
“수료식은 5주 뒤라고 했지?”
“응…”
“윤아도 오라고 할까?”
“응?”
“오늘 입소식 가보니까 다들 일행이 많던데, 한 명이라도 더 가는 게 나은 것 같아서. 내가 아들이 없어서 몰랐네. 그런 곳엔 아는 사람 다 데려가야 하는 걸.”
혜진은 사람들로 가득하던 입소식 운동장을 떠올리며, 셋은 좀 초라했나 생각했다.
“윤아, 캐나다 갔다며? 그때쯤 와?”
“승우 보러 가자고 하면 언제든 올걸?”
“아…그러면 안 되지. 자기 계획이 있을 텐데.”
“계획은 무슨…”
혜진이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지애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가는 거야. 모레 봐.”
“응.”
혜진이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엘리베이터 입구로 들어갔다. 조용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아파트 건물은 고요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진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어두웠다. 혜진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어 그녀는 바로 안방으로 갔다. 가방과 겉옷을 바닥에 떨구듯 내려놓고, 혜진은 곧장 침대에 누웠다. 이불이 차가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혜진이 전화를 받았다.
<“잘 들어갔지?”>
“응. 들어왔어. 집에 잘 가고 있어?”
<“아, 애 아빠가 지금 밖에 나와 있다고, 거기로 데리러 오래. 한잔했나 봐.”>
“그래… 감사하다고 전해줘. 차도 좋은 거 빌려주시고. 벤츠 태워 준다더니, 더 좋은 걸 태워줬어.”
<“아~ 하하, 아침에 가져가라고 해서. 괜찮았지?”>
“덕분에 호강했어.”
<“애 아빠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언니, 오늘 힘들었을 테니까 우선 잘 쉬어. 그리고 아무 때나 필요하면 바로 전화해.”>
“알았어.”
걱정 말라고 두어 번 더 말하고 혜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둔 가방과 겉옷을 원래 자리에 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그녀는 화장대에 있던 로션을 얼굴과 몸에 발랐다. 로션을 문지르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방 안을 걷는 소리 같은 것들이 어색하도록 크게 들렸다. 움직이지 않는 순간엔 집 안이 너무 조용했다. 이상한 전파 울림 같은 것이 귓가에 윙윙 거리는 것 같았다. 잘 준비를 마친 후, 그녀는 방의 불을 껐다. 침대 옆 스탠드를 켜고, 늘 그랬듯 침대 한쪽에 베개를 세우고 앉았다. 혜진은 휴대폰을 꺼내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눈이 퉁퉁 부은 혜진, 긴장한 승우의 허연 얼굴,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던 모습까지 사진첩에 있었다. 지애 덕분이었다.
‘어쩜 그 사진들과 이렇게 비슷할까?’
다른 것이라고는 남편 대신 승우의 얼굴이, 시어머니 대신 자신의 얼굴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혜진은 휴대폰 속 사진을 하나씩 천천히 넘겼다. 별다른 표정 없이 사진을 보던 그녀는 문득,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혜진은 이불을 보았다. 하얀 바탕에 조그만 분홍 꽃잎과 초록 나뭇잎 자수가 드문드문 놓인, 꽤 오래된 차렵이불이었다.
‘……’
지금 승우는 어디에 누워 어떤 이불을 덮고 있는 걸까? 혜진의 마음이 찔린 듯 아팠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혜진은 베개를 베고 누웠다. 그녀가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오늘 그 시간 그곳에 함께 있어야 했던 바로 그 얼굴.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혜진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종… 훈…”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혜진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용기 내 더 또렷이 불렀다.
“이종훈…”
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슨 귀신같은 것을 부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러보면, 아니 소리 내 부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생생히 들리던 때도 있었다. 관심과 장난이 섞인, 혜진을 따뜻이 부르던 그 목소리. 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소리도 부름도 혜진을 찾지 않았다. 혜진은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 방엔 이종훈뿐 아니라 김혜진도 없는 것 아닐까? 그녀가 손바닥으로 매트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보송한 질감이 느껴졌다. 이것만은, 이 감촉만은 진짜겠지. 그녀가 주먹을 꼭 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종훈. 종훈아… 종훈아…이 나쁜 종훈아. 내가 너한테 그때 꼭 있어 주라고 했잖아. 네가 책임지라고. 내가 모르는 거니까 네가 알려줘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어딨 니? 너는 진짜 무책임해. 이종훈. 이 무책임한 사람아.”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베개 위 초록 잎사귀 자수의 색이 짙게 변했다.
“이종훈아, 듣고 있니? 듣고 있어? 너는 나빴어. 약속도 안 지키고. 그래서…그래서 내가 반말하는 거야. 너는... 오빠가 돼서, 오빠처럼 행동해야 오빠지, 너는 오빠도 아냐. 그러니까 반말이나 들어라! 이 나쁜 이종훈아.”
하루 종일 가슴속을 짓누르던 육중한 검은 바다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젖은 듯 몸과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참았던 울음이 거세게 터졌다.
“흑흑… 흑흑흑…”
이불속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듯 감싸며 혜진은 울었다.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내 안에 있었나 놀랄 정도로 눈물이 끊임없이 나왔다.
“엉엉엉…엉엉엉…”
누가 들을까 혜진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혜진은 온몸의 진이 다 빠질 때까지 계속 울었다. 하지만 어쩌다 그녀가 울음을 멈추는 짧은 순간엔,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했다. 슬픔과 절망, 두려움 그리고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사실까지도, 하룻밤도 못 채울 눈물에 녹아 이 작은 방 안에서 흔적도 없이 휘발되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고작 한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어두운 밤은 한참이나 남았다. 혜진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이 천장에 기이한 그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방 안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혜진과 저 그림자뿐이었다. 혜진이 인상을 썼다. 하도 울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과 입은 퉁퉁 부었고 쉬어버린 목에선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볼썽사납게 우는 것도 곁에 누군가 있어 주어서 하는 거였어. 진짜 혼자면 우는 것도 부질없어…’
혜진은 손을 뻗어 스탠드를 껐다.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 그녀는 죽어 있는 다른 물건들처럼 차갑게 누웠다. 팔다리부터 손목과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시리고, 아팠다. 혜진이 눈을 감았다.
‘이종훈… 종훈 님… 아깐 내가 말을 좀 심하게 했나? 그치만, 너도 약속 못 지켰으니 좀 봐줘. 부탁 좀 할게. 네 아들 지켜줘. 난 그 애를 못 보지만 오빠는 하늘에서 볼 수 있잖아. 그 애 좀 지켜줘. 제발, 부탁이야.’
또 눈물이 새어 나오자, 혜진이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오늘 밤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무서워 잠들기 싫었지만, 지친 몸은 침대에 푹 파묻혔다. 잡을 게 하나도 없는 모래 함정에 온몸이 휘감겨 빨려 들어가듯,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잘 잤니? 좀 괜찮아?”]
닫힌 커튼 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린이 잠에서 깼다.
[“아… 다녀오셨어요?”]
[“그래.”]
소파에 누워있던 모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앤디가 소파 옆 탁자 위에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내려놓았다.
[“소피는 조쉬와 잠깐 나갔어. 비행기는 밤이니까 조금 더 있다 나가도 돼.”]
[“아…네…”]
모린은 영화제 폐막식 밤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 갑작스러운 복부 통증으로 새벽에 응급실을 갔었다. 병원에선 큰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앤디는 모린을 위해 일정을 미루고 부산에 하루 더 머물렀다. 모린의 안색이 좋아진 후, 그들은 서울로 왔다.
[“아빠,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계획을 다 바꿔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생각보다 한국에 오래 있게 되었잖아요.”]
[“모린, 너 때문에 바꾼 게 아니란다. 일정이 바뀐 거야. 소피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하… 소피…”]
[“내가 오자마자 아주 즐겁게 나갔단다.”]
모린이 피식 웃었다. 앤디가 탁자 위에 있던 물병을 들어 모린에게 건넸다. 물을 마시는 모린을 보고 있던 앤디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프고 지친 모린의 모습. 오래전,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던, 모린을 닮은 한 여인이 생각났다. 앤디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기를… 맞을 준비는 많이 했니?”]
[“아직요. 브랜든을 만나면 좀 물어보려고요. 요즘엔 어떻게 아기를 키우는지 그쪽이 더 잘 알 테니까요.”]
[“그래. 물어볼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구나.”]
[“네. 마음이 편해요. 소피를 가졌을 때는…”]
말하던 모린이 멈칫거렸다.
[“그… 때도 잘 지나갔어요. 지금은 더 여유가 있지만.”]
[“… 모린, 미안하구나.”]
[“네?”]
[“내가 옛날에… 그때 너를 잘 보살피지 못했지. 너를 너무 혼자 두었어.”]
갑작스러운 앤디의 말에 모린이 놀랐다.
[“아… 아니에요. 아빠. 아니에요. 아빠는 바빴고, 저도 좀… 그땐… 예상하기 어려운 딸이었고…또, 이건 아빠가 잘 모르는 부분들이잖아요…”]
[‘모린과 대화를 좀 해보세요.’]
조쉬의 말을 듣고 앤디는 그날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달랐다. 대단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아주 작은 행동이면 되었을 것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모린의 방에 가서 모린을 살폈어야 했다. 밤늦게 귀가했을 때도, 꼭 모린을 보러 갔어야 했다. 그때는 왜 그게 이 아이를 방해하는 것이라고만, 나의 일과에 무리가 되는 것처럼만 생각했을까? 앤디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앤디가 탁자 위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모린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너희를 가졌을 때, 엄마와 자주 공원을 산책했었단다.”]
[“영국이에요?”]
[“아니. 오스트리아.”]
[“아…”]
모린이 신기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았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곳이군요.”]
[“기억나니?”]
[“아니요. 기억은 잘 안 나요. 그런데 알고 있어요. 어렸을 때 이곳에 오래 있었는데. 정말 심심한 곳이었어요.”]
앤디가 웃었다.
[“네 엄마가 애쉬튼을 가졌을 때도 그리고 브랜든을 가졌을 때도, 우리는 계속 이 공원을 산책했었어. 귀여운 요정들이 한 명씩 늘어나는 재미가 있었지.”]
모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참 예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온갖 매체가 귀찮게 구는 통에 아빠와 엄마는 영국에서 평화롭게 살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는 그들이 선택한 도피처였다. 종이를 곱게 들고 보던 모린이 물었다.
[“그곳에 가면 이것이 그대로 있을까요?”]
[“있겠지. 아주 똑같진 않을지 몰라도.”]
앤디의 말에 모린이 그림을 더 자세히 보았다.
[“저 이거 가져도 돼요?”]
[“그럼.”]
[“어? 정말요? 아빠에게 소중한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요정에게 주어야지.”]
[“아… 하하하”]
모린이 크게 웃었다. 시원한 입매와 분홍빛이 도는 두 볼이 탐스러웠다. 앤디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어린 시절 미소였다. 앤디의 귓가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세 꼬마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네 엄마라면 항상 네 곁에 있었을 텐데.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았을 거야… 너를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 주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가고…”]
모린의 코끝이 붉어졌다. 어릴 적 빌었던 소원이 떠올랐다. 건강한 엄마와 손을 꼭 잡고 하루 종일 걸어보고 싶었다. 앤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나중에 엄마에게 크게 혼나겠구나.”]
[“아… 아니에요…”]
모린이 웃었다. 앤디도 모린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중년 로맨스 소설 [헬로, 앤디] 1부 끝.
2부 연재도 곧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