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린

헬로, 앤디 1

by SY전서주



늦은 밤,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 건너편 아파트의 불도 반쯤 꺼져 있었다. 혜진은 복도를 걸어 승우의 방으로 갔다. 그녀가 문밖에 서서 노크를 하고는 말했다.


“승우야, 엄마 잘게.”

“네. 안녕히 주무세요.”


혜진은 안방으로 걸어가며 복도와 거실 불을 껐다. 안방에 들어온 그녀는 문을 조심히 닫았다. 안방에 딸린 드레스룸과 화장실 문을 닫고 침대 옆 협탁에 있던 스탠드를 켰다. 안방 불을 끄고 그녀가 침대에 앉았다. 협탁 위 조그만 접시에 있던 핸드크림을 집어 손과 발에 얇게 발랐다. 은은한 향이 피어났다. 핸드크림을 내려놓고 그녀는 그 옆에 있던 안경을 들었다. 푹신한 베개에 기대앉은 혜진은 안경을 쓰고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앤디 코넬, 영화제 심사 위원장의 자격>

<끝없는 논란 속 폐막식을 준비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왜 꼭 외국인 심사 위원장 이어야 하는가?>


검색 사이트에 나온 기사 제목들을 읽고 혜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폐백실 마루에 앉아 이야기하던 앤디 코넬을 떠올렸다. 신나게 설명하며 웃고 농담하던 그가 그런 느낌이었던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야… 하지만,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기도 하니까…’


혜진이 드로잉스타 앱으로 들어가 새로운 댓글을 확인했다. 분수 그림 밑에 앤디의 댓글이 있었다. 혜진이 풉 하고 웃었다.


‘… 한글은 또 언제 배웠담.’


그녀가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기념으로 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낸 후 앱을 닫으려는데 답장이 금방 왔다.


<[정말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러고 싶어요. 주소를 알려 주세요.]>


몇 년 동안 파일 속에 묵혀둔 종이 한 장일뿐이었다. 잠깐이라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가지러 가도록 할게요. 그 우아한 대기실로.]>

<[가지러 온다고요?]>

<[네. 거기서 봐요.]>


‘뭣 하러 여기를 또 온다는 걸까…아, 출국하려면 공항에 와야 하는구나…’


혜진이 답장을 썼다.


<[네. 좋아요.]>

<[이틀 뒤에 괜찮나요?]>

<[네.]>

<[고마워요. 보답으로 예쁜 새 한 마리를 선물할게요.]>


‘새?’


안경 너머로 혜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무슨 새? 설마, 어디서 새를 사 오는 건 아니겠지?’


혜진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


하지만 입력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그녀는 적었던 글을 다 지웠다.


‘설마, 새를 사 올 리가 없잖아. 내가 너무 오버하는…’


고민하는 그녀의 눈앞에 사진 한 장이 떴다. 노란 부리를 가진 작은 새 열쇠고리였다.


<[Let’s Boogie.]>


따라온 메시지에 그녀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부산 달맞이 고갯길을 달렸다. 차도 양쪽엔 듬직한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싱그러운 녹색의 솔잎 사이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란 바다가 보였다. 승용차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달렸다. 이 길은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였다. 하지만 조쉬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좀… 천천히 가주시겠어요?”]


뒷좌석에 앉은 조쉬가 운전기사에게 말했지만, 검은 선글라스를 쓴 듬직한 기사는 답이 없었다. 그가 못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던 조쉬는 가까이에 있던 손잡이만 꼭 움켜잡았다. 조금 뒤 기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갑니다~.”

[“……”]


기사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기에, 조쉬는 그저 가야 할 곳에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조쉬는 단정한 턱시도 차림이었다. 셔츠 단추는 조금 풀어져 있었어도 격식을 갖춘 모습이었다. 폐막식 전이라 바빴던 그는 부산에 도착한 모린과 소피를 직접 데리러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모린의 상태에 대해 소피에게 전해 들은 후, 조쉬는 급한 일들만 마치고 길을 나섰다.


바다가 보이는 도로를 달리던 승용차는 높은 건물들을 지나 이제는 아파트 사이로 들어왔다. 차가 속도를 줄였다. 조쉬가 차창 밖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있어 보이던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반대편으로 달렸다. 그의 앞에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밀고 있던 유아차가 움직이지 않아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 재빨리 선 남자가 유아차 머리 부분을 살짝 들어주자, 여성이 유아차를 밀었다. 둘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각자 가던 길로 돌아갔다. 조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 모습은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도운 단순한 장면이었지만,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은 조쉬의 상식과 좀 달랐다. 저 남성과 여성은 짧은 대화는커녕 딱히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남자는 유아차를 들어주면서도 한 손으론 계속 휴대폰으로 통화 중이었고, 여성도 감사 인사를 별다른 말 없이 표정으로만 건네었다. 하지만 친절을 주고받는 모습은 친숙하면서도 신속해 보였다. 조쉬는 저 둘이 원래 아는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젊은 여성은 어깨에 메고 있던 큰 가방을 유아차 손잡이에 걸고, 앉아 있던 아기에게 말을 한두 마디 건넨 후, 다시 길을 걸었다.


그녀의 반대편에서 다른 유아차가 오고 있었다. 반대편 유아차를 미는 사람은 키가 작은 백발의 나이 든 여성이었다. 젊은 여성은 맞은편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에게도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 유아차에서 하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다시 보니 안에 타고 있던 것은 아기가 아니라, 하얗고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조쉬가 풉 하고 웃었다. 그는 길거리 사람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키링이 여러 개 달린 가방을 메고 헤드폰을 낀 채 걷는 여성, 똑같은 모자를 쓰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 화려한 색의 손수레를 끌고 나란히 걸어가는 노인들. 한 손수레에서 녹색 채소의 기다란 끝자락이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시장에 다녀오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저녁을 준비할 모습이 그려졌다. 조쉬의 두 눈이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조쉬는 집에 오면 문을 열기도 전에 할머니가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오는 날이면 현관에서부터 진한 스튜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있는 누군가는 좋겠군…’]


조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제 호텔 창문에서 내려다볼 땐, 그저 검은 머리에 같은 피부색을 가진, 복사기로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아시아인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옆에서 보니 하나하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조쉬의 차 옆으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장난을 치며 지나갔다. 그들 맞은편엔 외국인 두 명이 수영복 위에 가벼운 가운만을 두른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을 보고 깜짝 놀란 학생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는 외국인을 피해 벽에 바짝 붙어 총총총 걸어갔다. 자동차가 다시 속도를 냈다. 조쉬는 바깥에서 시선을 거두고 편히 앉았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답답하고, 지루하고, 모든 게 비슷해 싫증 나면서도 한편으론 아기자기하고, 안전하고, 가족 같고, 투명했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쉬는 아까부터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다. 사거리에서 승용차가 좌회전한 뒤, 바다 옆 도로로 들어섰다. 코앞에서 짙은 색 바다가 출렁거렸다. 잠시 후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건물 앞에 승용차가 멈췄다. 조쉬가 물었다.


[“여기가 맞나요?”]

[“네. 말씀하신 곳입니다.”]

[“아…네…”]


생각보다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통유리로 된 4층 높이의 건물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먼바다 위를 지나가던 하얀 요트가 건물의 유리 벽에 비췄다. 조쉬가 뒷좌석 문을 열자, 기사가 물었다.


[“기다릴까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필요하면 연락드리죠.”]

“네, 알겠습니다.”


조쉬가 내린 후 승용차는 출발했다. 건물 안에서 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3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바로 앞에 <라구나비치>라고 쓰인 서프보드가 보였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 조쉬는 모린을 금방 찾았다. 창가에 앉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햇볕 아래 불타고 있었다. 검거나 흰 머리카락 색이 보통인 이곳에서, 그것은 재밌게도 위험 표식처럼 보였다.


[“조쉬,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야, 모린.”]


모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쉬와 가볍게 포옹했다. 둘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

[“전혀요. 재밌었어요.”]

[“다행이군.”]

[“차를 보내줘서 고마워요. 짐이 많았는데 덕분에 수월했어요. 부산도 큰 도시군요. 길에 영화제 배너가 달린 걸 봤어요. 축제 분위기가 나요.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아, 올 때 어떤 다리를 건넜는데, 세상에, 그거 조쉬도 건넜나요? 얼마나 무섭던지!”]

[“아, 그 다리?”]

[“네. 빙글빙글 끝도 없이 올라가는데 아래로는 바다만 보이고 너무 무서웠어요.”]

[“하하하, 맞아. 그 다리, 나도 건넜어.”]

[“저는 두 다리가 덜덜 떨리도록 무서웠는데 소피는 얼마나 재밌어하던지, 그 애는 정말 겁도 없어요.”]

[“어, 그런데 소피는 어디 갔지?”]

[“아래층에 있을 거예요. 가게들 구경하러 갔어요. 소피는 신났어요. 여기저기 혼자 얼마나 잘 다니는지 몰라요.”]

[“그렇군. 아차! 모린, 소식 들었어. 축하해요!”]

[“고마워요. 며칠 동안 입덧 때문에 뭘 먹기가 힘들었어요. 버거가 먹고 싶었는데, 여기 맛있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나?”]

[“네. 소피가 그러던데 조쉬가 추천해 주셨다던데요?”]

[“… 아니? 난 아니야.”]

[“그래요? 그럼, 누구지? 아, 무슨 상관이람. 소피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많더라고요.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아요. 여기도 다른 데서 알았나 보죠.”]

[“좋아. 좋아. 다행이야.”]


대화하는 내내 조쉬는 모린의 표정을 살폈다. 모린도 그의 시선을 느꼈다. 분명 그는 모린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땐… 지금이랑 달랐으니까.’]










15년 전, 모린이 소피를 임신했을 때, 그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첫 임신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진 후에야 자신이 만나던 남자가 사실은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린은 임신 기간 내내 런던 저택에 혼자 머물렀다. 그때 영국엔 그리 많지도 않던 파파라치들이 저택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중정을 산책할 때를 제외하고, 모린은 주로 자신의 방에 있었다. 창문도 거의 열지 않았다. 소피의 친부는 초반엔 계속해서 모린에게 연락했다. 그 마음만은 진실한 것이라 모린은 믿었지만, 앤디가 둘이 당분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그에게 전한 후 그가 연락을 멈추자, 모린은 크게 낙심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자신의 방에 갇힌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 앉아 있으면 옛 생각이 났다.


모린은 꽤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저택은 늘 친절한 사람들로 북적였고, 모린은 두 동생과 사이가 좋았다. 바쁜 아빠와 아픈 엄마 때문에 가끔 슬프기도 했지만, 대부분 행복했다. 특별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사실, 엄마가 얼마나 아팠던 건지 어린 모린은 잘 알지 못했다. 익숙했던 그 평화가 진짜가 아니었음을 모린이 깨닫게 된 것은 하필이면, 그녀의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직후였다. 가족끼리 치른 장례식이었음에도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연이어 터지는 카메라 조명에 어린 모린은 공포를 느꼈다. 모린은 코넬 가족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자신만이 조금 다른 흥밋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티브이며 신문에 끊임없이 실리는 뉴스의 내용은 대부분 모린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그녀가 앤디의 친딸이 아닐 거라는 비아냥이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모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앤디가 모린을 위로하면, 모린은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아빠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모린에겐 바로 아래 동생이 둘이나 있었지만, 그들이 친아들임을 의심하는 기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모린의 마음을 모른 채, 앤디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앤디는 몇 달씩 저택을 비웠고, 모린과 두 동생은 일주일에 한 번 아빠와 짧게 연락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어쩌다 돌아오면 앤디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다정히 안아주었지만, 모린은 아빠의 향이 조금씩 낯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가 돌아오면 네 가족은 런던의 저택 가족실에 모였다. 하얗고 포근한 러그 위에 이국의 기념품을 잔뜩 꺼내놓고, 앤디는 아이들이 가본 적 없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잔잔한 음악 같은 아빠의 멋진 목소리는 비어 있던 집을 부드럽게 채웠다. 그것은 세 아이가 간절히 기다리던, 가족실 한쪽에 있던 고급 난방기로는 만들 수 없던 따뜻함이었다. 애쉬튼과 브랜든은 아빠의 어깨에 매달려 놀며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모린도 그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에겐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묘한 순간들이 있었다.


[“애쉬튼, 중정에서 또 돌멩이를 가져왔어?”]

[“저 아니에요, 브랜든이 그랬어요.”]

[“아빠, 이거 눈사람이에요.”]

[“흐음…”]


작고 하얀 돌멩이 두 개를 포개 놓은 것을 다시 갖다 놓으라 차마 말하지 못한 앤디는 모린을 보고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아빠, 나중에 치우라고 할게요. 그냥 두세요.”]

[“너희들, 모린이 봐주라고 해서 이번만 봐주는 거야. 모린의 말을 항상 잘 들어야 해.”]


아빠가 동생들 몰래 모린에게 윙크하면 모린은 싱긋 웃었지만, 마음속 실금은 여전히 따끔거렸다. 하지만 모린은 티 내지 않았다. 아니, 낼 수 없었다. 아빠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멋지고 품위 있는 배우, 그 ‘앤디 코넬’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에겐 모린뿐 아니라 애쉬튼, 브랜든도 있었다. 모린에게 아빠는 단 하나뿐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아빠가 남들에게는 하지 않을, 이를테면 애정이 가득 담긴 푸른 눈동자로 모린을 지긋이 바라보는 그런 행동을 할 때면, 그녀는 그 어떤 부정적인 반응도 꺼낼 수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곧 또 어딘가로 떠나야 했기에, 모린은 자신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바로 ‘가족을 위한 모린’이란 역할이었다. 저택에는 세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부담스럽거나 힘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비어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어디선가 불안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그늘이 모린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났다. 모린과 두 동생의 키가 훌쩍 큰 것과는 반대로, 아빠를 향한 애정 표현과 기념품에 대한 열열한 반응은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아빠의 기념품 공세도 시들어졌다. 하지만 모린의 마음은 단단해졌다. 표현은 줄었어도 생각은 깊어졌다. 그녀는 아빠와 동생들을 보살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엄마의 바람이리라 생각했다. 저택의 중정에 애쉬튼과 브랜든이 나란히 앉아, 구석에 있던 먼지 쌓인 상자에서 찾아낸 조그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모형 10개를 쭉 늘어놓고 웃으며 장난치던 날만 해도, 그녀는 앞으로도 이렇게 착실히 살아간다면, 행복한 일이 많이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런던의 한 작은 골목을 지나던 그녀는 중고 책방 앞에 걸음을 멈췄다. 자그만 입구 옆에 오래된 잡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맨 위에 있던 잡지의 표지를 보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런 사진도 있었네…’]


낡은 잡지의 표지를 가득 채운 것은 젊은 시절 아빠의 사진이었다. 모린은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던 그런 종류의 잡지였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기분이 달랐다. 날씨가 좋았고, 런던에서 그런 날씨는 귀했고, 또 그 사진 속 아빠가 지금 자신의 나이쯤인 것 같아, 그녀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그곳에 서서 한참 동안 여러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그녀는 제목을 하나 보았다.


<[우리의 앤디를 훔쳐 간 그녀의 정체!]>


질투 섞인 재미난 글일 줄 알았는데, 그 기사를 읽고 모린은 엄마가 사실 아빠를 만나기 전에 짧은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왜 엄마가 우울했는지, 왜 아빠는 미안해했는지, 왜 자신만이 조롱당했는지. 눅눅한 종이 냄새가 풍기던 그 중고 책방 앞에서, 그녀는 굳은 듯 서 있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서둘러 골목길을 뛰어나올 땐, 그 맑던 하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린은 떠나고 싶었다. 열일곱 살 생일이 지나고 그녀는 프랑스로 갔다. 아주 멀리 갈 용기는 없었지만, 영국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에겐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소피의 친부를 만났다. 소피의 친부는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화가였다. 그의 가족은 포르투갈의 두오로에서 큰 포도주 농장을 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나를 좋아하지. 슬픔이 몰려올 때 달콤한 포트 와인을 적시에 선사했으니.’]

[‘영국인 중에 내가 당신을 제일 좋아할걸요?’]


재능이 넘치는 예술가인 그에게 모린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프랑스 시골을 여행하며 젊은 연인은 둘만의 세상을 살았다. 어쩌다 조그만 가게에서 보잘것없는 기념품을 보고 있으면, 모린은 아빠 생각을 했다. 왜인지 모르게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남자와 나눈 비밀을 언젠가 아빠에게 전하는 날,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다.


[“볕이 너무 강해. 포도가 좋아할 날씨야.”]


한낮, 잔디에 누워 있으면 한 손으로 빛을 가려 모린의 눈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그가 찬양하던 두오로엔, 푸른 강 옆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포도주 농장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아이도 있다는 것을 모린은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바다 건너 영국을 뒤흔들었다.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 잡지의 홍수 속, 임신한 모린이 도망칠 곳은 결국 떠나왔던 런던의 저택밖에 없었다. 그녀는 방 침대에 누워 닫힌 창문만 바라보았다. 이곳을 떠날 때 들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앤디 코넬의 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것들과 앤디 코넬의 딸인 덕분에 피할 수 있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후회와 원망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젠 다 사라진 후였고, 남은 것은 하나였다. 동글게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모린은 이것은 분명 좋은 것이라고 애써 중얼거렸다.








모린이 식사를 마쳤다. 빈 접시 위에 ‘라구나버거’라는 조그만 글씨가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는 입덧이란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도 어쩌면 호사일까?’]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싱가포르에 오길 잘했어요. 훨씬 마음이 편해요. 소피랑도 사이가 좋아진 것 같고요. 조쉬는 어때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나? 나는 매일 비슷해. 일은 바쁘지만 이 정도 일이야 늘 있었으니까. 몸도 괜찮아. 계속 관리하고 있어.”]

[“다행이에요. 아빠는… 좀 어때요?”]

[“앤디? 나보다 건강하지.”]

[“그 여자는요?”]

[“누구? 에바?”]

[“…그런 이름이었나요?”]


모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모린, 사실이 아니야.”]

[“알아요. 아는데… 그냥, 뭐랄까… 자꾸 엄마 생각이 나요.”]

[“오, 모린…”]

[“아빠가 아무 대응도 안 하는 건… 뭐, 예전에도 그러셨지만, 지금은 좀 화가 나요. 왜 아빠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 말도 안 하실까. 왜…”]

[“모린, 알잖아. 앤디가 직접 말을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모린의 눈가가 붉어졌다. 조쉬가 손을 뻗어 모린의 손을 토닥였다. 모린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하하, 정말 왜 이러지? 임신해서 이런가 봐요. 자꾸 기분이 이랬다 저랬다 하고…”]

[“당연히 그럴 수 있어.”]


모린이 손바닥으로 눈을 쓱쓱 비비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쉬, 그거 아세요? 제가 갖고 있는 엄마 사진 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엄마 사진이 훨씬 많아요. 제가 기억하는 엄마와의 추억은 겨우 두세 가지뿐인데, 인터넷엔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빠의 친딸임을 의심받을 때마다, 모린은 엄마가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코넬 가족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 엄마라는 슬픔으로부터 모린을 지켜내는 데 완벽히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모린은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면서 엄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수천 번 엄마 이름을 검색했다. 엄마와 아빠는 어릴 적부터 작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아빠가 열 살 무렵 티브이 배우로 데뷔하고 런던으로 가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어떤 이유로 아빠가 스무 살 무렵 마을로 돌아왔고, 거기서 엄마를 다시 만났다.


[‘예쁜 사랑 이야기인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까?’]


아빠와 엄마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의 어조, 그리고 거기에 달린 댓글은 모질고 냉정했다. 모린은 이해하기 힘든 세상을 살았다. 그리운 엄마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그런데 거의 모두가 엄마를 미워하는 세상.


[“저는 괜찮지만, 소피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요. 소피한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린, 걱정하지 마.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니… 아니에요.”]


모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왜 이러지? 정말 호르몬 때문인가 봐요.”]


눈물을 닦으며 모린은 애써 웃었다.


[“조쉬, 죄송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자꾸 울기나 하고…”]

[“오, 모린… 괜찮아…”]


조쉬가 옆에 있던 냅킨을 건네자 모린은 그것을 받아 들고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조쉬는 생각했다. 그 앤디 코넬의 딸인 것과 손녀인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걸까?


[“모린… 소피는 걱정하지 마.”]


유명한 할아버지와 아름다운 엄마, 그리고 비록 멀리 있지만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친아빠. 지금 소피에게는 있는, 예전에 모린에겐 없던 것들이었다.


[“소피는 달라. 그 애는… 소피는 요즘 애잖아. 완전히 다른 세대. 겁도 없고 용감하고 아는 것도 많고.”]

[“하하, 맞아요.”]

[“어, 엄마 울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모린과 조쉬가 고개를 돌렸다. 소피가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 한 사람이 더 보였다.


[“아빠!”]

[“모린!”]

[“앤디?”]


앤디가 앉아 있는 모린의 옆으로 걸어갔다. 모린이 안기자 앤디가 모린의 등을 토닥였다.


[“얘가 왜 울지?”]

[“지금 폐막식 준비 시간 아닌가요?”]

[“엄마 요즘 자주 울어요.”]

[“소피… 엄마 창피해.”]

[“괜찮아요. 임신하면 그렇대요.”]

[“그런가? 임신해서 그래?”]

[“앤디? 폐막식 준비 끝났어요?”]

[“어? 어. 그렇지. 끝났어.”]

[“끝나셨으면 바로 인터뷰하셔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 그렇지.”]

[“하셨어요?”]

[“… 그게”]

[“설마, 그냥 오셨어요?”]


조쉬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앤디!”]

[“지금 간다고 해줘. 미안.”]


넷은 건물 밖으로 나가 앤디가 타고 온 차에 함께 탔다. 조쉬는 바쁘게 전화 통화를 했다. 앤디가 모린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굳이 왜 왔어?”]

[“소피가 오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혼자 와도 되는데 엄마가 따라온 거예요!”]

[“네가 어떻게 혼자 와?!”]

[“모두 제발 조금만 조용히 좀 해줄래요? 지금 통화 중이라고요!”]


셋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시 후 앤디가 외투에서 휴대폰을 꺼내 소피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소피의 눈이 커졌다.


[“네가 좋아하는 가수가 이 사람 맞지?”]

[“네, 맞아요!”]


신이 난 소피도 휴대폰을 꺼냈다. 앤디에게 22SEOUL 멤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러 명이군? 이 중에… 내가 사진 찍은 사람이 누구지? 이 사람은 아닌 것 같고…이 사람인가?”]

[“……?”]


사진 속 인물들의 화장이 너무나 진했기에 앤디의 눈엔 멤버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슷해 보이는데…”]

[“세상에, 할아버지… 진짜…”]


소피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인종차별주의자예요?”]


앤디와 모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가장 사색이 된 것은 기자와 통화를 하던 조쉬였다. 조쉬의 절망하는 표정에 앤디와 모린, 소피는 가는 내내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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