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서울 버튼 호텔 객실의 깨끗한 유리창 밖으로 하늘이 맑았다. 파란 하늘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초록 산등성이를 향해 쭉 뻗은 넓은 차도 양쪽에는, 노란 잎사귀를 가득 매단 커다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벼운 바람에도 나무는 잎사귀를 흩뿌렸다. 자그만 샛노란 부채가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며 차 위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가벼운 외투 위로, 그리고 회색빛 인도 위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호텔 객실 안, 창 옆에 놓인 베이지 색 소파 위에 한 소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얇은 외투를 입고 작은 가방까지 어깨에 멘, 외출 준비를 다 마친 차림이었다. 소피는 호텔 방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22SEOUL 카페가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22SEOUL는 소피가 좋아하는 K-pop 그룹이었다. 할아버지가 싱가포르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지 말고 한국에 가서 깜짝 놀라게 해 드리자고 엄마에게 슬쩍 말한 것은, 할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이 22SEOUL 멤버의 생일 카페를 직접 가 볼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한국에서 하는, 오리지널 생일 카페잖아!’]
엄마가 괜찮은 생각이라며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 소피는 안고 있던 커다란 쿠션에 얼굴을 묻고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22SEOUL 카페에 간 다음에 스톤에이치 전시관이랑 토이가든에 가야 하는데, 어디가 더 가깝지?’]
한참 검색을 하던 휴대폰 화면 속, 서울 지도 위로 드로잉스타 앱 알람이 울렸다. 소피가 소식을 확인했다. 친구 레이가 사진을 올린 것이다.
[‘아…’]
가족 식사 사진이었다.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색색의 중국 전통 의상을 입고, 푸짐한 음식이 가득 차려진 큰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었다. 레이는 할아버지 옆에 서서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앞에선 이렇게 웃네…’]
똑똑한 레이는 말이 없고 무뚝뚝했다. 키가 크고 스타일이 좋은 그녀는 교복을 입었을 때 유난히 모델 같았는데, 그 첫인상에 호감을 느끼던 사람들도 그녀 특유의 냉랭한 반응을 한번 겪고 나면 뒷걸음질을 쳤다. 레이는 매일 등하교 라이딩을 해주는 엄마에게도 웃으며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사진 속 레이는 할아버지 옆에서 사랑스러운 손녀처럼 웃고 있었다. 소피가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한국에 잘 도착했어?]>
레이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방금 소피가 <좋아요>를 누른 것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응.]>
<[좋겠다. 담엔 나도 같이 가.]>
<[그래.]>
레이가 소피에게 사진 하나를 보냈다. 메일 전송을 마친 컴퓨터 화면 사진이었다. 사진 끝에 레이의 브이(V) 자 손가락이 보였다. 소피가 메시지를 보냈다.
<[와, 벌써?]>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알지? 너도 약속 지켜.]>
사실, 소피가 스톤에이치 전시관에 가야 하는 이유는 레이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레이는 K-pop 그룹 스톤에이치의 팬이었다. 소피가 서울에서 열리는 스톤에이치 데뷔 4주년 기념 전시에 들러 한정판 굿즈를 사다 주는 대신, 레이가 소피의 SPSS 과제를 해주기로 했다. 숫자에 약한 소피에겐 최고의 거래, 똑똑한 레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물론이지! 오늘 오후에 갈 거야.]>
<[OK. 히히. 그담엔 뭐 할 거야?]>
<[장난감정원에 가려고.]>
<[?]>
‘박여사님의 장난감정원(Mrs.Park’s Toy Garden)’은 어린이용 캐릭터 장난감을 파는 곳이었다. 조금 망설이던 소피가 메시지를 적었다.
<[브랜든 삼촌 쌍둥이들이 곧 태어나거든. 선물 주려고.]>
<[그거 우리 집에 많은데. 다 가져가.]>
레이에겐 어린 동생이 둘 있었다.
<[동생들이 허락할까? ◡̈]>
<[같이 가져가.]>
<[뭐?]>
<[걔들도 좀 가져가 줘. 며칠 만이라도. 하루에 인형 3개씩 줄게. 너는 혼자라 좋겠다. 동생이라면 지긋지긋해. 나도 너처럼 엄마랑 둘만 여행 가보고 싶어.]>
[‘……’]
무슨 말을 할까 조금 머뭇거리다 소피는 그저 웃는 이모티콘만 보냈다.
<[그리고 뭐 할 거야?]>
<[오늘은 그렇게만 하려고.]>
<[저녁은 뭐 먹어?]>
<[글쎄?]>
과연 뭘 먹을 수나 있을까? 소피는 생각했다.
<[나 서울 맛집 많이 알아. 내가 알려줄까? 스톤에이치 멤버들이 먹는 거 맨날 봤어.]>
도도한 레이가 폰으로 틈만 나면 스톤에이치 먹방 영상을 보던 것이 생각나 소피가 미소 지었다.
<[오늘은 호텔로 일찍 돌아올 거야. 내일 부산에 가야 해.]>
<[부산? 부산이 어디야?]>
<[나도 잘 몰라.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거야.]>
<[거기도 맛집이 있겠지. 내가 찾아볼게. 팬클럽에 물어보면 돼.]>
[“우웩…”]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구역질 소리가 또 들렸다.
<[글쎄. 모르겠어. 그냥 피자나 버거 먹으려고.]>
<[소피, 나 가야 해. 나중에 또 얘기하자.]>
<[그래. 안녕.]>
메신저를 닫고 소피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몸을 일으켜 앉은 후 고개를 쓱 빼고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쏴아 하고 물소리가 들렸다.
[‘스톤에이치 전시관에 갔다가 거기도 들르려면 빨리 나가야 하는데…’]
사실 소피는 오늘 일정 마지막엔 레이가 예전에 말해줬던 재밌는 이벤트를 해 볼 참이었다. 부산에 내일 아침에 가야 하니 기회는 오늘 저녁밖에 없었다. 별로 멀지도 않았다. 이 호텔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우웩… 웩…”]
다시 구역질 소리가 들리자, 소피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녀가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머리칼을 한 손으로 정리해 잡은 엄마는 다른 한 손으로는 변기를 잡고 계속 헛구역질 중이었다.
[“엄마, 괜찮아?”]
[“우엑…”]
소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보았다. 망설이던 소피가 가까이 다가가 엄마의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 하지 말고 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소피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아니… 난 걱정이 돼서…”]
[“후우…”]
모린은 인상을 쓴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 소피. 고마워. 괜찮아. 엄마 괜찮으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이거 금방 괜찮아져. 좀 수그러들면 바로 나가자.”]
[“아니, 아프면 안 나가도…”]
[“아…”]
모린이 다시 인상을 쓰자 민망해진 소피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창문 옆 소파에 아까처럼 걸터앉았다.
[“우웩…”]
소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소피가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올려 둔 모린의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소피가 모린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허니]>
발신자의 별칭을 보고 소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피가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인기척을 느낀 모린이 날카롭게 말했다.
[“저리로 가 있으라니까?”]
[“전화 왔어.”]
모린이 소피가 건네는 휴대폰을 받았다. 이름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풀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헤이, 허니.”]
다정한 목소리에 소피의 마음이 굳었다. 다시 소파로 되돌아오며 소피는 귓가에 아른거리는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우려 애썼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가방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서울 리스트’라고 적은 메모가 있었다. 소피가 손가락으로 긴 메모를 훑어 내렸다. 마지막 줄에 소피의 시선이 멈췄다.
<[한복 체험. 가족사진도 찍어줌]>
소피가 휴대폰 화면을 다시 껐다.
[“…네. 그렇죠… 맞아요.”]
부산의 한 호텔 스위트룸 거실에서 조쉬는 한창 전화 통화 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더운 듯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바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네. 좋아요. 그렇죠…”]
끝없이 맞장구를 쳤지만, 조쉬의 시선은 밖을 향해 있었다. 어딜 보나 축제였다. 영화제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호텔 앞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운 똑같은 검은 머리칼의 아시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조쉬는 이상한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요. 저도 그 얘기를 했어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표정은 무심했다.
[“… 그러니까요. 아시잖아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순간 조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묘한 냄새가 났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의 비린내와 거북한 음식 냄새 그리고 어쩌면 낯선 이들의 체취까지 섞인 불편한 냄새였다. 조쉬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커튼까지도 반쯤 닫아버렸다. 그는 벽에 달린 조절기로 걸어가 거실 온도를 더 낮췄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에서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찬 기운에 열을 식히려 애쓰는 그의 통화 목소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거실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노트북에 기사를 쓰고 있던 영국인 기자가 조쉬를 흘끗 보았다.
[“……”]
기자는 리모컨을 들어 거실 벽 한가운데에 있던 큼지막한 티브이의 볼륨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그는 조쉬를 한 번 더 살피고 다시 자신의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얼마 후, 그의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확인했다. 작은 화면을 읽던 짙은 검은색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그때 만났어야 했는데…”]
영국인 기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조쉬에게 걸어갔다. 통화 중이던 조쉬는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조쉬에게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그게, 어려울 것 같아서…”]
기자가 내민 화면을 제대로 읽은 조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네. 오늘 저녁엔 어려울 거 같다는 거예요. 오늘 저녁엔. 아시다시피 폐막식 전야제가 있잖아요. 기자님도 그렇고 앤디도 바쁠 테니 서로 여유 있게, 내일… 점심때로 잡아보죠. 네, 네, 좋아요. 오케이. 바이.”]
통화를 급히 마친 조쉬가 영국인 기자의 휴대폰을 빼앗듯 낚아챘다. 화면을 마구 올리며 내용을 읽은 그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야…?”]
휴대폰 속에는 앤디가 영화제 주변을 오가며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웬일인지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건 이런 사진만 모은 거잖…!”]
<[영화제 심사 위원장 앤디 코넬은 특히 K-pop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한국 가수들이 함께했던 자리에서 그는 유독 어린 소녀 가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모 밴드의 한 멤버와는 긴 시간 동안 둘만의 대화를 나누었다. 개인 연락처까지 교환했다는 사실에, 그녀의 매니저가 몹시 언짢아하기도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조쉬가 황당함에 소리를 내질렀다. 영국인 기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화제의 직원이라 밝힌 누군가와 인터뷰한 것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인종차별을 했어요.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인데도 그는 한국인을 보면 정중하게 인사를 하기는커녕 못 본 척 무시했어요. 뻔히 앞에 서 있거나 옆을 지나가는데도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더군요. 한국에서 초청받아 왔음에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대체 이건 무슨 얘기야? 앤디가 인종차별을 했다고? 아니, 앤디가 그럴 리가 있어? 앤디는 그런…”]
무언가 생각하던 조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세상에…”]
조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러웠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 호텔 객실 문을 두드렸다.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조쉬와 기자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똑똑똑
다시 노크했음에도 안의 반응이 없자,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무도 없나요?”]
조쉬가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영국인 기자가 문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말하며 그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밖에는 영화제 직원이 서있었다.
[“안에 계셨군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조쉬가 대답하자 기자가 문을 활짝 열었다. 영화제 직원은 혼자가 아니었다. 조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좀 느리지만 또렷한 발음의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했지만 조쉬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아시안의 피부색과 검은 머리칼. 며칠 동안 봤던 비슷한 모습들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심플한 검은 드레스 위에 섬세한 주름이 가득 잡힌, 흰색의 얇고 풍성한 재킷을 입은 여성이 보좌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김 영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그녀가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김 영이 작게 속삭였다.
“음… 바꿔야겠네…”
김 영은 문 옆에 있던 꽃을 눈짓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그녀 뒤에 서있던 직원은 짧고 정중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무언가를 받아 적었다. 조쉬와 영국인 기자는 그들의 한국어 대화를 이해하고 있기라도 한 듯 경직된 자세로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김 영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더워서 땀을 흘리던 조쉬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김 영이 우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아…네. 물론입니다.”]
[“더 좋은 호텔도 있었지만, 이 호텔이 도시 한가운데 있어 이곳으로 정했습니다. 부산 영화제는 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축제이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느껴보시길 바랐습니다. 이 호텔에선 해운대와 영화의 광장이 잘 보이거든요.”]
하지만 조쉬 뒤편에 있던 창문은 굳게 닫힌 채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김 영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조쉬의 두 발은 철근이 달린 듯 무거웠다.
[“그렇… 군요.”]
[“이제 곧 폐막식입니다. 남은 기간 잘 보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짧게 대화를 나누러 왔습니다. 오, 마침 티브이가 켜져 있군요. 아…그런데 소리가 안 나오네요.”]
영국인 기자가 리모컨을 찾아 재빨리 소리를 켰다. 김 영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압니다. 기자이시죠?”]
[“네…”]
그의 대답과 상관없이 김 영은 티브이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제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한국어 뉴스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화면에는 앤디 코넬의 사진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었다.
[“뉴스의 내용을 이해하시나요?”]
조쉬와 기자가 대답하지 못하자, 김 영이 직원에게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직원이 객실 문을 열자,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통역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네요.”]
김 영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보는 조쉬의 이마에 다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소피는 한 손에 22SEOUL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스톤에이치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두툼한 것이 꽤 무거워 보였지만 소피의 표정은 밝았다. 소피가 길 위에 쇼핑백 하나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보았다. 휴대폰에는 방금 산 22SEOUL의 검은색 반짝이 열쇠고리가 달랑거렸다. 모린이 소피를 불렀다.
[“소피, 엄마가 들고 있을게.”]
[“아니야. 괜찮아. 아, 찾았어. 이 방향 맞아.”]
소피는 엄마가 쇼핑백을 들지 못하게 재빨리 다시 집어 들었다. 엄마의 표정이 조금 머쓱해졌다. 소피가 엄마를 흘끗 보고 말했다.
[“엄마, 피곤해? 저기 저 가게야. 테이블이랑 의자 보이지? 힘들면 밖에 앉아 있어도 돼요. 음료랑 간식도 팔아요.”]
[“그래. 엄마는 좀 앉아 있을게.”]
마침내 둘은 ‘박여사님의 장난감정원’ 앞에 도착했다. 고층 건물의 2층만 한 높이의 커다란 유리 벽 안으로, 보송보송한 동물 인형들이 쭉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예쁜 피규어들과 장식품 사이, 꽤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바깥 카페 테이블 위에 소피가 쇼핑백을 올렸다.
[“엄마, 여기 앉아요. 날씨 좋아서 밖에 있기 좋다. 뭐 마실래요? 내가 사 올게.”]
모린은 대답이 없었다.
[“… 엄마?”]
[“여기가 이런 데었구나… 나도 한번 들어가 볼래.”]
[“어...? 알았어.”]
소피가 쇼핑백을 챙기는 사이 엄마는 투명한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인형들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소피는 그런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형을 하나하나 살피던 모린은 보송한 토끼 인형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소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소피가 폰을 확인했다. 할아버지와 관련 있는 뉴스에 알림 설정을 해 둔 것이 울린 것이다. 기사의 제목을 보고 소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앤디의 또 다른 스캔들-이번엔 아시아?]>
<[앤디 코넬, 너무나 달콤한 그의 심사]>
<[영화제 심사 위원장 교체 위기?!]>
[“이게…무슨…?”]
비슷한 기사들을 몇 개 더 확인한 소피는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게 안쪽 구석에서 휴대폰으로 통화 중인 엄마가 보였다.
[‘조쉬 아저씨랑 이야기하시나?’]
소피가 엄마를 향해 걸음을 뗐다. 그러나 두어 걸음 가지 못하고 곧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살짝 자세를 돌린 엄마는 휴대폰 화면에 인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소피의 표정이 굳었다. 엄마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소피가 사랑하는 엄마의 미소였다. 반짝이는 유리문 밖에 혼자 선 소피의 눈가가 붉어졌다. 소피는 누군가에게 들킬까 서둘러 돌아섰다. 휴대폰에 달린 검은색 22SEOUL 열쇠고리가 보였다. 조금 전 들른 22SEOUL카페에서 멤버들 사진을 보며 엄마가 말했었다.
['너는 그 가수가 왜 좋아?']
['그냥. 멋져요. 노래도 좋고 예쁘고...']
['그래? 그게 예쁜 건가? 그래. 예쁘긴 하다… 음… 네가 여기서 학교를 다녀서 그런가?']
['......?']
['널 아시안 학교에 보내서 미적 관점이 좀 그렇게 바뀐 걸까?']
['응?']
['... 영국 학교로 다시 가야 하나? 하하하.']
['......']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을 가릴 쿠션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면 브랜든이 있는 호주라도...']
['다 골랐어.']
작은 바구니에 기념품을 가득 담고, 소피는 계산대로 가버렸다. 소피는 아까 샀던 그 열쇠고리를 손에 꼭 쥐었다. 반짝이는 22SEOUL 글자를 보며, 그녀는 좋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