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부산의 한 호텔 회의실의 커다란 창 너머로, 맑은 하늘 아래 푸른 바다가 가득히 보였다. 회의실 바닥을 덮은 베이지색 카펫 위에는 흰색의 일인용 가죽 소파 여러 개가 바다를 향해 나란히 줄 서 있었다. 마치 모래사장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돌멩이들 같았다. 사람들은 알맞게 내려진 블라인드 그늘을 지붕 삼아 소파에 눕듯이 편히 앉아 바다를 감상하고 있었다. 커다란 소파의 발 받침대 위에서 쉬던 심사위원들의 지친 두 발을 따뜻한 햇볕이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시끌벅적한 영화제 속 흔치 않은 조용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조 용도 소파에 몸을 누이고 조용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글자를 천천히 읽던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서류를 꺼내 둘을 비교했다.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아름답군.”]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조 용이 옆 소파를 흘끗 바라보았다. 거대한 소파에 몸을 가린 아리얀의 발끝이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있었다. 조 용이 말했다.
[“다 만장일치예요… 남자 배우 빼고요.”]
[“아름다워.”]
[“로알드를 안 뽑으신 이유가 있나요?”]
로알드는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촉망받는 신인 배우였다. 아리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 용 또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곧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바다는 언제 봐도 아름다워.”]
아리얀이 말하고 휴대폰을 꺼내 창밖의 바다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을 마친 조 용은 서류를 전부 정리해 봉투에 넣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물론,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시겠지만.”]
[“싫어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조 용이 멈칫했다.
[“난 그가 싫어.”]
[“왜요?”]
[“영국인이라서.”]
조 용이 아리얀 건너편에 있던 또 다른 소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리얀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난 영국인이 싫어.”]
[“아…네…”]
[“그는 지독하게 계산적이야. 난 그게 싫어.”]
[“……”]
아리얀이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조 용을 바라보고 물었다.
[“'아름답다'를 한국말로 어떻게 말하지?”]
잠시 머뭇거리다 조 용이 말했다.
“아름다워요.”
[“뭐?”]
“아-름-다-워-요.”
“어룸달…?”
[“다섯 음절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름-다-워-요.”]
“알-움-다-월-요.”
[“네. 그걸 조금 빨리 말하세요.”]
“아룸달,월,요.”
[“네. 그거예요.”]
[“좋아. 다음에 써먹어야겠어.”]
그렇게 말해가지고 어떻게 써먹겠다는 건지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조 용은 꾹 참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리얀이 말했다.
[“지난 영화제에서 만났을 때, 로알드가 다음 영화에서 노숙인 역할을 할 거라고 했어. 비참하고 처절한 역할이었는데, 그런 역은 처음이라 긴장되지만 신이 난다고 하더군. 긴 대화를 나눴지. 그는 역시 소문대로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었어. 치밀한 것은 물론이고 분석이 좋았어. 영리했어. 나도 그의 연기를 기대했어.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직접 보니, 뭐랄까…”]
죽은 자식을 품에 안고 절절히 울던 로알드의 연기를 떠올리며, 아리얀은 인상을 찌푸렸다. 로알드는 그 장면을 자신이 설명했던 그대로 정확히 만들어냈다. 화면을 30도, 15도, 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점차 깊은 감정을 끌어내는 그의 표정은 카메라 너머 관객들이 선망하는 시선까지 계산하는 듯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했다. 노숙인답게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더러움마저 장식 같았다. 화면에 그의 눈동자가 가득 비췄다. 사람들이 칭송하던 로알드의 푸른 눈동자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파이어에 비유했었다.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리자, 아리얀은 속이 매슥거렸다. 똑 떨어지던 눈물방울은 기괴한 쇼의 마침표 같았다.
[“하나의 오차도 없는 연기였어.”]
소파에 다시 편히 앉은 아리얀이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선글라스에 부산 바다가 검게 비췄다. 바다를 향해 아리얀이 말했다.
“아룸-다워요.”
발음은 어색했지만, 왠지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조 용 또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앉아 있던 아리얀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 용의 옆으로 왔다.
[“조 용, 또 뭐가 아름다운지 알아?”]
그는 조 용의 눈앞에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희뿌연 하늘 아래 메마른 모래벌판이 가득 펼쳐진 사진이었다.
[“한국엔 사막이 있나?”]
[“아니요.”]
[“하하, 그럴 줄 알았어. 자네는 꼭 인도에 와야 해.”]
아리얀은 조용에게 사막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 하얀 모래는 넓은 들판처럼 굽이치는 구릉처럼 그리고 높은 산처럼 화면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아름답지?”]
조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얀이 다음 사진으로 화면을 넘겼다. 노을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모래언덕을 가로지르는 남성의 사진이었다.
[“날세.”]
[“와…”]
어느새 둘 옆으로 걸어온 앤디가 아리얀의 휴대폰 속 사진을 보고 말했다.
[“사막에서 사이클링이라니 멋지군.”]
[“사이클링뿐이 아니야. 쿼드 바이크, 패러세일링도 할 수 있지.”]
[“낙타도 탈 수 있나?”]
[“그럼.”]
아리얀이 손가락으로 휴대폰 속 사진을 넘겼다. 몇 번의 터치 뒤 낙타 한 마리와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이 나왔다. 소녀는 낙타와 키를 맞추려는 듯 나무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소녀는 낙타를 보고 있었는데, 낙타는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우리 딸이 어릴 때부터 키우던 낙타야. 이름은 다우(Dhow). 자이살메르 (Jaisalmer) 혈통이야.”]
다음엔 둘을 조금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리얀을 닮은 쾌활한 미소가 눈부신 소녀의 어깨너머로 낙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금색의 술이 달린 분홍빛 천을 머리에 쓴 어린 낙타의 긴 속눈썹과 입가의 장난기가 귀여웠다. 앤디와 조 용이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차례차례 감상했다.
[“거기, 오른쪽이 우리 딸. 왼쪽 말고.”]
덧붙인 아리얀의 말에 앤디가 풉 하고 웃었다. 조 용이 물었다.
[“낙타도 애완동물처럼 키울 수 있는 동물인가요?”]
[“물론이지. 낙타가 얼마나 똑똑하고 충성스러운데. 어쩔 땐 심지어 유머러스하기도 해.”]
[“오, 그래?”]
[“그런데 이제는 많이 커서 사막 가까이에 있는 농장으로 보내야 해.”]
아리얀이 보여주는 사막과 낙타의 사진을 보던 앤디가 물었다.
[“이 사막의 이름이 뭔가?”]
[“타르 (थार, Thar).”]
[“타르?”]
[“타르 (थार) 모루스탈 (मरुस्थल). 모루스탈이 사막이란 뜻일세.”]
[“아, 그러면 타르 사막(Thar desert)인 거군.”]
[“아니, 아니.”]
아리얀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타르 모루스탈 (थार मरुस्थल).”]
[“오케이. 타르 모루스탈.”]
[“그거야.”]
아리얀이 만족하자, 앤디가 미소 지었다. 사진을 보던 앤디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룸-다-워-요.”
아리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또 언제 배웠어?”]
[“나는 배우야. 빨리 외워.”]
[“이런…”]
아리얀이 조 용을 향해 말했다.
[“내가 말했지? 영국인들은 지독해.”]
앤디가 피식 웃었다. 주머니에 있던 앤디의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앤디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는… 가봐야겠어. 다들 나중에 만나세.”]
[“그러지.”]
앤디가 휴대폰을 손에 들고 회의실 문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헬렌이 들어왔다.
[“죄송해요. 늦었어요.”]
헬렌이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앤디는 재빨리 문을 잡아 주었다. 헬렌이 앤디에게 고맙다는 뜻의 눈인사를 했다.
[“아! 헬렌.”]
밖으로 나가려던 앤디가 돌아서서 헬렌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룸, 다워요.”
말하고 헬렌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은 앤디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
영문을 모르는 헬렌은 그대로 서있었다.
[“저 봐, 저것 봐… 나는 영국인이 싫어.”]
아리얀이 불평하자 조 용은 가만히 웃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영화의 광장을 박미희가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녀는 정장 차림이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목에 걸린 신분증이 거추장스러워, 그녀는 신분증을 빼고 끈을 둘둘 말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광장에 새로 만든 무대와 체험 부스들이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휴대폰으로 주변을 찍으며 가상현실 화면 속 숨어 있는 귀여운 갈매기 *'부기'를 찾는 관광객들도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미희는 폐막식 준비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나왔고, 지금은 관계자들이 모여있는 호텔로 향하는 중이었다. 미희가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기분 좋게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로비 중앙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 숨어 있는 귀빈용 엘리베이터 앞에는 안내원이 서 있었다. 미희가 주머니에 있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자, 안내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 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미희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몇 층 위에서 내린 그녀는 복도를 걸어 한 회의실 문에 노크했다. 그러자 대답 대신 문이 불쑥 열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말과 함께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에 미희가 깜짝 놀랐다.
“아, 네, 안녕하세요.”
한 여성이 회의실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미희에게 예쁜 미소로 가볍게 인사하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미희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
그녀 또한 정장 차림이었다. 태닝을 한 듯 피부가 조금 짙었지만, 외모가 분명 아시아인, 아니,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방금 인사말의 발음이 묘하게 외국인 느낌이 났다. 미희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들어와요.”
“네!”
미희가 서둘러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십 분쯤 지난 후, 그녀가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맞은편 회의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조 용 감독이었다.
“엇, 안녕하세요. 감독님.”
조 용 감독을 알아본 미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조 용의 어색한 표정을 보고 미희가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저 기억 못 하시는군요. 박미희입니다.”
“아, 네.”
조 용이 박미희가 방금 나온 회의실을 흘끗 보았다. 김 영 대표가 있는 곳이었다.
“폐막식 때문에 보고드릴 게 있어서 잠시 왔습니다.”
조 용이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미희가 속삭였다.
“… 저는 이쪽 아닙니다. 저쪽도… 아니고요… 저는 시 소속입니다.”
박미희가 목에 걸고 있던 공무원 신분증을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신분증을 돌리자, 뒷면에 노란 주둥이를 가진 하얀 갈매기 그림이 보였다.
“저는 다른 거 없이 시설 보러 왔습니다. 시설만.”
“아…네…”
“감독님은 어디 가시나요?”
“잠시 밖에…”
“저도 나가려던 참입니다. 같이 가시죠.”
“네…”
둘은 복도를 함께 걸어 엘리베이터로 갔다. 미희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벌써 거의 30년이 되었습니다.”
“…네?”
“부산국제영화제요. 30년이 다 되었어요.”
“아……”
“그동안 참 별일 다 있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사실, 그때 저는 여기 없었지만, 그때도 다들 ‘이게 내년에 또 가능할까?’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대요. 제가 왔을 때도 정신없었고요. 이번엔 진짜 뭔 일 나겠다 싶은 적도 있었는데, 어찌어찌 또 넘어가더라고요. 신기하죠?”
“아, 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둘이 탔다.
“영화제가 딱 며칠만 하니까 이게 가능한 거 같아요. 이번만 넘기면 내년에 저 인간 안 오겠지, 그리고 잊고 살았는데, 다음 해에 영화제 하는데, 아니, 저놈이 또 왔네? 그런데 나도 또 왔어… 뭐 그런 거죠. 하하. 그래서 저는 사실 이번 일도 별로 신경이 안 쓰입니다. 안에서 싸우던 밖에서 뭐라 하던, 그 정도 사건은 항상 있었어요. 이제는 그러든지 말든지. 근데 이게 망하거나 없어질 수는 없어요.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는 멈춘 쪽이 나쁜 쪽이 되는 거라서요. 누구도 자기가 있을 때 멈출 수는 없죠. 만약에 그렇대도 다시 굴리는 쪽이 영웅이 되겠지요.”
조 용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저 같은 사람이야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원래부터 구경하듯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또 처지가 다른 것이… 저는… 이제는 언제 나가든 상관이 없어서. 하하…”
“네…”
“제가 쫌 오~~래됐습니다. 요즘엔 그래서 즐겁게 일하려고 합니다. 이런 감독님 같은 분도 제가 나중에 언제 또 뵙겠습니까? 영화제 손님들도 그렇죠. 외국에서 오시는 분들도 좋은 영화, 좋은 풍경, 좋은 사람들 보시고 그것만 마음에 담아 가시면 되겠다 싶어요. 요맘때 부산이 그러기에 딱 좋죠. 번잡한 여름 지나서 좀 한가하고, 날씨도 좋고요…”
“…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미희와 조 용 감독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안내원이 둘에게 인사를 했다.
“수고하십시오.”
미희가 말하자 조 용도 안내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둘은 로비를 걸어 호텔 정문으로 향했다.
“어디 여 근처에 산책 좀 하셨습니까? 해운대 옆에 산책로 좋은데 많은데요.”
“네. 한번 심사위원들 모두 모시고 바다 구경하며 걸었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그럼, 요 앞에 길 정비 잘 된 거 보셨나요? 여기도 다 제가 감독해서 한 겁니다. 이거 승인받는대도 진짜 오래 걸렸어요.”
신이 난 미희의 말에 조 용은 고개만 끄덕였다. 로비 끝자락에 있던 호텔 기념품 가게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사람들 몇몇이 가게의 유리문 밖에서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찍고 있었다.
“안에 누가 있나 봐요?”
박미희와 조 용이 기념품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둘은 멀찍이 서서 안을 보았다. 유리문 안엔 물건을 고르는 하얀 셔츠 차림의 키 큰 외국인 남성이 있었다.
“앤디 코넬…”
미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걸음을 멈춰 서서 앤디 코넬을 바라보았다. 앤디 코넬은 점원이 골라주는 물건들을 세심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미희의 머릿속에 오래전 만났던, 하늘색 셔츠를 입은 왕자님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 두 볼이 발갛게 물든 채로 버벅거리며 영어를 내뱉던, 어렸던 자신도 떠올랐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히야… 감독님, 그거 아세요? 왕년에 앤디 코넬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우리 때 앤디 코넬 하면 진짜 난리가 났었어요. 어찌나 잘생기고 멋있었는지. 뭐, 지금도 괜찮지만…”
“아…네…”
“젊은 사람들 눈엔 그저 나이 든 외국인 할아버지로 보이려나요? 근데 저 같은 사람 눈엔 뽀송뽀송했던 젊을 적 모습이 생생합니다.”
조 용이 웃었다. 미희가 나직이 말했다.
“참, 이게 나이 들고 보니까 이제는 누구 보면 그저 다행이다, 애썼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시간이, 이 시간이란 게 사람 마음을 좀 다듬어주나 봅니다. 좁은 마음도 넓게 해 주고 마음의 담장 같은 것도 다 무너뜨려 주고요. 저 사람이야 대단한 부자에 유명한 사람이고 제가 아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냥 제 생각이, 저 이뻤던 사람이 크게 곡절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구나, 지금도 괜찮게 늙어서 잘살고 있는 거 같으니 참 좋구나, 싶어요. 저렇게 이쁘고 잘생긴 사람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기가 또 얼마나 유혹과 함정이 많았겠어요. 저 정도로 살아냈으면 용케 잘 해쳐냈구나 하는 거죠. 이쁜 게,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렇게 비슷하니 이쁘게 남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 일입니까?”
조 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몰라. 유명한 사람인가 봐.”
“완전 할아버지인데?”
젊은 남성 둘이 지나가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미희가 씩 미소를 지었다.
“…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 외국 손님들이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조 용이 조금 웃었다.
“저분들이 한국어 못하는 게 저분들한테도 그리고 우리한테도 참 다행인지도 몰라요. 하하…그럼, 감독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 찍으세요?”
“네?”
“사진…”
조 용이 가게 안을 가리켰다. 그렇게 좋아했던 배우인데 왜 멀리 서라도 사진 한 장 찍고 가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아…”
미희가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있습니다. 찍어둔 거.”
박미희가 인사하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간 후 조 용은 다시 기념품 가게 속 앤디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유리창 안에서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어두운 복도에 홀로 서있는 자신보다, 화려한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가 더 쓸쓸해 보였다. 조 용은 앤디가 가게에서 나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앤디가 가게에서 나오자 조 용이 손을 높이 흔들었다.
[“오, 거기 있었군.”]
조 용을 보고 앤디가 반가워했다. 조 용이 앤디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사셨어요?”]
[“귀여운 게 많아.”]
앤디는 종이봉투를 열어 마그넷과 열쇠고리, 작은 인형 같은 자잘한 기념품들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응. 나눠주려고…엇, 잠시, 미안, 전화가 오는 군.”]
한 발짝 떨어져 전화를 받는 앤디에게 프라이버시를 주려, 조 용도 한 걸음 떨어져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인터넷 사이트 메인 화면에 주요 뉴스들이 있었다. 조 용은 부산국제영화제 검색어를 터치했다. 곧 있을 폐막식에 초청된 가수들의 인터뷰, 수상이 유력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보였다. 개막식이 있기 직전까지 있던 영화제 내부 분열 기사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앤디가 조 용에게 걸어왔다.
[“급한 전화가 와서 들어가 봐야겠어.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었나?”]
[“아닙니다.”]
[“그럼, 나중에 봐.”]
인사하고 앤디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조 용은 호텔 밖으로 나가며 휴대폰을 마저 들여다보았다.
“……”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확인한 후 그가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드로잉스타에 방금 올라온 앤디의 사진이 있었다. 그가 한국 여성들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었다.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앤디 코넬>
제목은 나쁘지 않았지만, 댓글들은 썩 그렇지 못했다.
<누구지?>
<언제 적 앤디 코넬?>
<젊을 적 사진 보고 옴. 진짜 잘생김>
<와, 나온 영화 하나도 몰라…>
<폐막식에 누구 나오지?>
<[아시아에 가니 스타 대접받고 좋은가 봐?]>
<왜 자꾸 한물간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거지?>
<[딸은 내팽개치고 다른 나라에서 사진이나 찍고 있네.]>
<폐막식 TV 중계 하나?>
<잘한다~잘한다~돈 많이 쓰고 많이 사가세요.>
댓글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 외국 손님들이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박미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 용이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부기: 부산시 캐릭터. 귀여운 생김새의 갈매기.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