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와라, 카타시모 와인푸드 시찰
아침에 일어나 카시와라시로 이동했다. 카시와라 시는 오사카 부에서 제1로 꼽히는 포도 산지다. 하지만 앞서 방문했던 시가 현의 오우미후지처럼, 노령화는 산업을 위협했다. 새로운 젊은 인력의 유입 없이 나이가 들어가는 노령 인구들은 포도 농사를 포기했고 소수가 그 땅까지 인수해 포도 농사와 포도주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고 있어, 매장의 벽들은 모두 상들로 채워져 있다.
자부심으로 메워진 매장에서 설명을 듣고 포도산지로 이동했다. 뒷구릉은 모두 포도를 기르는 곳이었다. 언덕을 오를 때마다 머리에 닿을락 말락한 포도들이 가득했다. 기억이 맞다면, 이렇게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보는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포도를 직접 따먹을 수 있게 해주셨는데, 단연컨대 이렇게 단 포도를 먹은 일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포도를 많이 좋아하는데, 직접 먹은 포도는 놀랄만큼 높은 당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포도들은 포도주가 된다. 저농약 기법으로 기르다보니 군데군데 벌레의 흔적들이 눈에 띈다.
구석구석 난 좁은 길을 따라 포도나무들을 구경했다.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를 직접 눈에 보기도 했다. 그 길 곳곳에는 큰 거미들이 거미줄을 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거미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이었으나 그런 거미들이 있는 것이 본래 자연스러운 것일 게다.
골목들과 조용한 거리를 지나 와인을 시음하는 곳으로 갔다. 이곳에는 제조공정과 오크 통에 담겨 숙성되는 와인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와인을 보관하는 곳은 서늘했다. 그 다음에는 와인 시음을 했다. 나는 술맛은 1도 모르지만,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포도주스는 정말로 맛있었다. 4종류 정도 되는 와인도 시음했는데 나는 애초에 와인 맛을 몰라서 어떻다고 평가할 수가 없었다. 다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인이 정말 맛있다고 한 걸 보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와이너리를 시찰하며 들었던 이야기와 뇌리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을 지속한다는 데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유럽, 그 중에서도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일본에서 와인을 생산한다 해도 그것을 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초에 기후와 풍토가 달라 생산되는 포도가 다르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와인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그 산업이 일본 내에서도 '지는' 산업임에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분명 자부심이었다. 그 자부심은 '지속'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부터 그것을 해왔던 땅에서 그 일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 그것이 자부심이 되고 그것이 동력이 되고 그것이 경쟁력이 된다.
일본을 다니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생각보다 변화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기술력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모습을 선택한 것이다. 단순히 전통을 지킨다-의 개념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을 굳이 바꾸지 않는 관습. 이를테면 화장실이 그러한데, 왠만한 건물에는 양변기 위주로 설치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수세식 변기가 많다. 신식건물임에도 수세식 변기는 꼭 설치되어 있다. 이런 점은 '바꾸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이유인 것일까?
이를테면 영국은 '똑똑한 새로운 일을 하느니 멍청한 기존에 하던 일을 하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기존에 해오던 일을 중시하는 문화가 강하다. 영국에 존재하는 제도, 관습, 문화가 현대에도 왜 그런지를 따져보면 '그냥 예전에 그랬으니까'라는 것이 주된 이유니까. 심지어 이번 브렉시트 건을 두고도 '노인들은 통합 전 EU를 살았기에 예전을 선호한다'는 분석까지 있었다. 허나 일본이 그 정도로 변화를 거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는 '변화를 싫어한다기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다보니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면 바꾸지 않는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일부분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단 그런 문화차이에서 시작한 것만은 아니겠으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비해 지방의 산업들이 건재한 이유는 그 자리에서 계속 자신의 일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문화라고 생각이 된다. 반대로 매일같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이 곧 능력이 되는 우리 사회를 비교할 때,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듯 하다. 한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추구하는 일본의 시도들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와이너리를 떠나서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처음 일본에 들어온 그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살짝은 우울하고, 살짝은 감성적인 야릇한 기분. 보통 거기에는 여행에서 쌓인 피로함이 겹쳐 들뜨지 않는 상태가 된다. 공항에서는 시간이 많지 않아 사진을 찍고 체크인을 하고 살짝 면세점들을 둘러보고는 게이트로 왔다. 비행기를 탈 때 쯤엔 이미 해가 어둑어둑해서 하늘색이 짙었다.
비행은 조용했다. 기내에서 나온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잠이 들었다. 11일은 짧고도 길었다. 1일차, 2일차에는 일정들을 지나며 '아직 1일 차네' '아직 2일 차네'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이 많다보니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짧아졌고 정신차려보니 6일, 8일, 10일을 지나 마지막 날이었다.
여행자의 시야는 좁고도 넓다. 여행자의 발은 여행지에 있을지는 모르나 그의 중심은 여행을 떠나온 곳에 있다. 그 여행자는 그곳에 사는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새로움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가졌으나 동시에 그는 여행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가 보는 것은 어쩌면 365일 중 그가 보았던 잠깐의 특이한 모습일 수도 있고, 그가 만난 사람과 장소는 여행지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다. 여행자의 눈은 정확하지만 동시에 정확하지 않다.
그간 해왔던 건 여행은 그 여행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내 의지가 아니라, 그것은 한계였다. 내가 그곳에 살지 않는 이상. 어쩌면 산다 하더라도 수십 수백년 그 자리를 메워온 이들의 인식과 문화를 속속들이 알거나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이번에는 그 자리를 조금 벗어났던 것 같다.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묻고,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이들의 삶의 방식이 담긴 곳까지 방문을 하고, 그 생각과 시야들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여행자의 자리에서 조금 움직일 수 있다. 단언컨대 그것은 정말로 쉽지않은 경험이었다.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일본인들, 그들을 바라본 11일 간의 나. 여러 차례의 여행과 다방면의 관심을 통해서 갈수록 세심한 부분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눈이 생기고 있다는 점에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사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던 처음의 여행보다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여행은 어느정도 그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 여행자의 자리에서 그들의 자리에 발을 대어보는 경험은 즐거웠다.
나는 내가 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바로 다음 날부터 바쁜 일상을 소화해야 했다. 내가 보았던 그들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읽은 여행책에서 누군가는 "여행도 중독"이며 한 번 중독되면 평생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음을 경고했다. 나는 내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허나 자리를 지키고 싶은 사람이 타인의 자리에 발을 댈 수 있기는 만무하다. 몸을 기울여 더 볼 수는 있으나 나는 언제고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내 자리에 있다고 믿으므로.
허나, 11일 간의 일본은 나를 흔들리게 했다. 일본 여행은 내게 '자리를 떠나는 일'에 대한 마음을 부추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 열심인 땅에서 말이다. 11일 간의 기억과 모습, 생각과 대화는 사진과 몇 줄의 글, 조금씩 옅어질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나중에는 아련해져 몇가지 강렬한 순간에 대한 아련함이 주가 되겠으나, 그 기억이 계속 내게 '비행기를 타'라고 은연 중에 설득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일본 여행은 그 어떤 여행보다 여행자로서, 어쩌면 방랑자로서의 삶을 부추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여행 아닌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여행은 기간과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필연코 어느 정도의 향수를 동반하지만, 이번 일본에서의 11일은 그렇지 않았다. 늘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본국에 대한 그리움(평소의 감정과 무관하게)을 살짝이라도 느꼈던 나는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여행 내내 나에게 날아오는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것에 대한 중독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 허나 어쩌겠는가. 본래 위험할 수록 매력적이고 위험할 수록 끌린다는 것을. 최소한 나는 11일 간의 만남 이후에 일본을 이야기하고, 일본을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때로 강력한 그리움을 동반해 공항 대합실에 앉아 있는 순간을 부추길 가능성이 큼에도 말이다.
새로움을 만나는 건 언제나 굉장한 경험이다. 11일 간 나는 잠시 마법에 빠질 수 있었다. 그것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