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효훈 Jun 26. 2018

2002 월드컵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시즌이 시즌인만큼 2002년 월드컵에 대한 얘기도 엄청나게 나온다. 난 축잘알은 아니지만(해외축구 중계도 없던 시절 인터넷으로 방송 찾아가서 봤던 기억도 중고등학생 시절이고, 20살 넘어서는 거의 관심을 끊었다. FM 역시 2005~2012까지만 플레이했다) 당시 한국팀을 굉장히 정확하게 묘사한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웨이>를 읽고 많은 점을 이해하게 됐는데, 거기에 더해서 당시에 뛰었던 축구선수들의 자서전들이나 당시 다큐들을 종합해서 몇 가지 2002년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딩크 자서전이 '기록'으로서 유의미한 이유는, 한국 국가대표팀을 맡은 이후에 해당하는 분량은 따로 쓴 것이 아니라 당시에 썼던 일기들의 모음이기 때문이다(실제로 국가대표팀을 맡는 과정부터 한국을 떠나기까지의 일기가 날짜와 함께 적혀있다). 그만큼 당시에 겪은 사소한 일과 감정들도 낱낱이 적혀 있다. 게다가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이나 한국인으로서 기분 나쁠만한 내용도 전부 주관적+객관적인 태도로 적혀 있는 편이다(애초에 자서전에 써먹으려고 적은 일기가 아니었다). 특히 당시 있었던 경기들에 대해선 한국팀의 실수나 부족한 점, 운이 좋았던 점 등도 그대로 인정하는 등 객관적으로 서술한 편이다.



1)2002년 월드컵 당시 결과는 모두 히딩크 덕분이다?


답부터 하자면 아니다. 2002년 월드컵은 개최국이라는 이유로 조별예선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게다가 '개최국으로서 16강에는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국가적 책무 앞에서 말 그대로 국가대표팀을 위해 수많은 헌신이 있었다. 히딩크가 원하는대로 선수 차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장기 합숙 전지훈련 등이 가능했다. 히딩크는 코칭스태프들까지도 기존 방식을 어겨가면서도 마음대로 선임해서 데려올 수 있었다. 물론 그런 히딩크에게 제동을 거는 '축구계 고위 관계자'가 많았지만, 당시 정몽준은 히딩크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고 '그냥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며 전권을 일임했다. 몇번이나 히딩크가 '잘릴 뻔한' 결과가 있었음에도(5-0으로 연패하던 당시 경기결과, 잦은 휴가-개인적인 부상 때문이었다-, 사생활 등)히딩크가 끝까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건 '16강'이라는 지상과제 앞이라서야 가능했던 극단적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맘대로'라는 히딩크의 선택이 대부분 옳았던 것이란 점도 한몫 했겠지만. 특히 월드컵 초기 이영표 부상 문제 해결을 위해 '지인'을 데려와 이영표를 맡기고, 코칭 스태프에 비디오 전문 담당관을 만들어 분석하게 하는 등 어찌보면 일반인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도 히딩크는 정말 '제멋대로'였다. 협회에 협조적이지도 않았고(협회의 요청을 '개무시'했다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말도 거칠게 했고(맘에 안 들떄마다 정몽준에게 온갖 불평을 했다), 모든 선택들이 기존 감독하고는 차원이 달랐다(한국 축구계 입장에서 부정적 의미로). 그 모든 걸 정몽준이 용인했고,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가 본 성과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고집이 받아들여지고, 짧은 기간 손발을 겨우 맞춰볼 뿐인 다른 국가대표팀과 달리 굉장히 긴 시간동안 하나의 팀처럼 운영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성공에 결정적 요인이었다. 히딩크의 장기적인 플랜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조건이었고, 그걸 알고 있던 히딩크는 애초에 그러한 사안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난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었다.



2)2002년 월드컵은 솔직히 한국이 운도 좋았고 판정 등에서 이득을 많이 봤다?


운과 판정에서 이득을 봤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진운도 좋지 않았고(특히 16강-8강-4강은 지금이나 그때나 당대 세계 최고팀 뿐이었다), 유럽에서 떠들어댄 것처럼 판정이 우리 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다만 익숙한 환경, 유례없는 응원 등의 홈 어드밴티지가 있던 건 사실이다. 게다가 모든 걸 떠나서, 기본적으로 축구 경기 결과에 나라가 뒤집히는 유럽의 주요 축구 강국에게 일부로 불리한 판정을 할 정도로 '간 큰' 심판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에 비해 당시 한국은 축구계에서는 아예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었다. 한국팀이 오히려 '개최국'이라는 이유로 이득을 본 건 다른 거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국가대표팀의 전략에 어울리도록 잔디 관리를 중요시여겼고, 개최국으로서 경기장 관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잔디를 조절하는 게(짧게 치고, 물기를 머금은 상태) 당연히 이용해야 할 특권이라고 적었다. 물론 폴란드 전 같은 경우에서 그랬듯 상대팀이 그러한 부분까지 관심이 없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역시 '실력'이다. 그러니까 당시 국가대표팀에게 그 정도 결과를 낼 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었느냐는 건데, 그 대답은 'YES'가 맞다고 생각한다. 히딩크는 선수들의 능력치를 전부 계량화했고, 이전에 자신이 맡았던 네덜란드 국대-레알마드리드 등과 비교했다. 히딩크가 자주 써먹던 체력 테스트 결과에서 세계 톱 클래스 선수들이 평균 120회였는데,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은 그를 상회하는 체력 수준을 보였다. 특히 차두리는 151회라는 '괴랄한' 수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짠 히딩크의 전략이 잘 어우러졌다. 드리블이나 슈팅 등 개인적인 능력에서 뒤처질 수는 있지만 히딩크는 전략과 체력, 조직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게 맞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포르투갈 전이다. 가장 완벽하게 상대를 압도했던, 그러니까 세계 톱 클래스 수준을 자랑하던 포르투갈 선수들을 아예 묶어버렸던 경기였다. 이는 다양한 유럽팀을 거치며 해당 선수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히딩크가 상대법을 알려주고(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히딩크의 제자였거나 이미 아는 사이였다), 매일 새벽 비디오를 돌려보며 파훼법을 찾았던 결과다. 포르투갈 전은 파울레타-핀투-피구를 묶고, 그들에게 이동하는 볼 배급을 차단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뒀으며, 그들이 수비에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공격에 집중하는 전략을 썼다.


월드컵 전에 치렀던 평가전-프랑스 전도 그랬는데,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1998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를 상대하는 방법-수비하다가 역습-과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했던 히딩크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했다. 그리고 이 전략을 그대로 써먹은 세네갈이 첫 경기에서 프랑스를 꺾는 이변을 만든다. 폴란드 전 역시 그랬는데, 당시 폴란드는 유럽 최강의 수비력을 자랑했다. 히딩크는 분석 끝에 수비진 빈틈을 찾아냈고 황선홍에게 그 공간에 들어가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이을용-황선홍의 첫골은 철저한 분석-훈련의 결과였다. 이탈리아를 상대할 당시 초반 전략-페널티킥을 얻어냈던- 역시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물론 안정환이 PK를 놓치고, 이후 선수들이 교묘한 팔꿈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하면서 어그러졌지만). 특히 후반에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집어넣는 극단적인 전략을 두고 '어떻게 그 생각을 했지'라는 이야기도 여전히 많이 돌고있지만, 당시 히딩크는 무작정 교체한 게 아니라 이탈리아가 공격수를 빼는 걸 보고 결정했다. 게다가 유상철-송종국-김남일 등 미드필드진에 대한 신뢰(수비수 역할을 해낼 수 있다)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서술했다(그리고 이러한 전술 역시 한국선수들이 멀티플레이어 기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적었다. 그는 한국팀을 분석하고나서 멀티플레이어들로 팀을 구성하는 전략을 짰는데, 국가대표팀을 맡고나서 선수들 대부분이 '양발잡이'란 사실에 '내가 원하는 전략을 실현할 수 있겠다'며 환호했다). 선수들에 대한 분석, 그를 바탕으로 한 팀 전략 구축, 상대 팀의 전술에 대한 대응이 기본적으로 모든 경기에 적용된 방식이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선수들은 모든 지점에서 톱 클래스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체력만큼은 왠만한 톱클래스들을 뛰어넘었으며, 거기에 멀티플레이어 전략과 선수-팀에 대한 세세한 전술과 오랜 기간 합숙하며 만들어진 조직력,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강렬했던 응원 열기가 함께 했기에 강력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오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탈리아 전 당시 토티의 '시뮬레이션 파울'과 그에 대한 퇴장은 히딩크는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오버된 판정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에 앞서 토티가 경기 중에 했던 반칙들에 대해 그냥 넘어갔던 점을 생각하면 '이미 예전에 받았어야 할 레드카드를 받은 것 뿐'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경기 이후 있었던 유럽 국가들의 '오심아니냐'는 항변은 축구 열기가 강한 국가가 패배 후 귀국해서 살아남기 위해 하는 흔한 핑계이며 모든 월드컵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일축했다(유럽 국가들은 아시아 팀에 대한 편견-초반에 거칠게 대하면 쫀다-이 있으며 이러한 방식이 통하지 않으면 당황하고, 아시아 팀에게 지는 것에 대해 절대로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히딩크는 자신들이 싸워왔던 팀이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과 같은 전세계 톱클래스 팀이라며 한국은 운과 오심으로 올라갔다는 당시 비판을 일축했다. 또 동시에 당시 월드컵을 치르며 주요 경기 이후마다 요한 크루이프 등 전설적인 축구인들이 '한국팀의 실력이 놀랍다'며 직접 전화를 하거나 언론을 통해 칭찬을 했다거나, 패배한 팀들의 선수들이 찾아와서 '한국팀이 정말 잘한다'고 밝혔다고도 적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 당시에 김태영의 코뼈가 무너질 만큼의 부상이나 각종 선수들이 당한 파울을 생각하면(이탈리아 전 당시 이천수가 발로 말디니의 머리를 찬 것 역시 당시에 선배들이 팔꿈치로 공격을 당하고 부상을 입는 걸 보면서 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일부러 한 행위라고 후에 직접 밝혔다) 모레노 심판은 오히려 소극적으로 판정을 내렸다고도 적었다. 실제로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이탈리아 전 부상으로 이후 경기 스페인-독일에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고, 이는 독일전 의 대표적인 패인요소가 됐다. 이탈리아전을 치르고 난 후 선수들의 상태 및 컨디션이 나쁘다는 걸 알았기에(경기 스케줄도 우리나라는 상대팀에 비해 늘 하루나 이틀을 덜 쉬는 등 악조건이었다) 히딩크는 애초에 스페인 전은 무조건 승부차기로 갈 수밖에 없다며 승부차기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3)당시 히딩크가 묘사한 여러 지점들


-한국은 선후배 문화가 너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실제로 선수들 간 무조건 반말을 하게 하고, 후배들이 도맡아 했던 잡일을 선배들도 함께 하도록 했다. 홍명보, 황선홍 등 당시 고참들은 나서서 골대를 옮기는 등 이에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선수들은 제외됐다.


-'한국은 테크닉이 부족할 뿐 투지와 체력은 있다'라는 당시 국내의 분석과 정반대로 '어느정도 실력과 테크닉은 있지만 체력이 없다'는 분석을 내렸다. 1998 월드컵을 비롯하여 당시 국가대표팀이 후반전 들어서 무너지는 것, 무리한 태클로 경고와 레드카드를 받는 것 역시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년 넘도록 체력훈련만 시켰다. 그리고 당시 한국 내 축구 교육은 체력, 트래핑, 패스 등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훈련이 너무 빈약했다고도 지적했다. 동시에 팀 전술이나 조직력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뛰는 게 문제라고도 지적했다.


-히딩크는 박지성을 발견한 날 일기에 '박지성, 완벽한 아이야!'라고 적으며 극찬했다. 김남일, 이천수 등을 기용한 이유는 실력과 별개로 '유럽의 거친 몸싸움 등에 맞설 깡이 있었기 떄문'도 있었다. 애초에 김남일을 뽑을 땐 '거친 선수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한 뒤에 추천받아 직접 경기를 보러 갔다. 그 외에도 히딩크는 성깔이 있는 선수를 좋아했다. 애초에 본인도 성격이 '더러운' 편이었다.


-히딩크는 한참 전부터 진지하게 월드컵 우승이 목표였다. 그걸 바탕으로 모든 계획을 짰고,그리고 당시 국가대표팀의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언제나 정장이나 유니폼을 맞춰 입고, 언제나 함께 식사를 하는 등 선수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팀이라는 사실을 늘 이해하라고 했다. 그리고 월드컵이 가까워진 뒤에는 매운음식을 비롯한 한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바로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파스타를 주로 먹였다.


-정신교육을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선수들과 계속 기싸움을 벌였고, 책임감과 팀 의식 확립을 위해 신경썼다. 김병지와 안정환은 대표적으로 '길들인' 선수였고, 설기현과는 '암묵적으로 싸웠다'.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자신감을 잃은 차두리는 응원을 했고, 이운재는 직접 이런 음식들을 먹지 말라고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요구들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선수는 과감하게 제외시켰고, 자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선수는 믿고 기용했다. 당시 홍명보는 부상 이후 슬럼프에 빠져 있었는데, 자서전에서 '히딩크 감독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고 믿고 그에 따라 스스로 혹독하게 훈련했다고 적었다. 히딩크는 이에 대해 '자신은 어떤 요구도 없었는데 톱 클래스 선수답게 이미 자신을 준비시킨 상태였다'고 적었다. 히딩크는 황선홍-홍명보-유상철은 실력으로나 정신력으로나 '존경할만한, 수준 높은 선수'였다고 밝혔고 실제로 신뢰했다. 포르투갈 전 당시 '비기기만 해도 진출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홍명보와 유상철 뿐이었다.


-과학적 분석과 데이터를 신뢰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선수별로 기술-신체-정신별로 능력을 수치화했고 유럽 톱클래스 선수들과 비교했다. 국가대표팀 훈련, 경기, 유럽 팀 경기 등을 모두 비디오로 담아 분석하고 그걸 공유했다. 히딩크는 잠을 3-4시간밖에 자지 않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밤과 새벽은 늘 비디오 분석에만 매달렸다.


-당시 국가대표팀은 완전경쟁체제였다. 애초에 그 누구도 실력이 없다면 선발될 수 없다고 경고했고, 23인 최종 엔트리에 들기 위해 선수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경쟁했다. 그리고 선수들은 이후 그 경쟁체제가 엄청나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시에 '홍명보 선배랑 황선홍 선배도 국가대표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된단 말야?'라는 건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히딩크는 당시 한국언론들이 자신의 사생활에 과도하게 관심을 가진다며 불평했다. 특히 자신의 여자친구와 관련된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대체 그게 왜 알아야 하는 일인지, 또 자신이 왜 그걸 밝혀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수 선발은 내가 하는 건데 왜 자꾸 주변(축구협회, 유명 감독들, 기자 등)에서 말이 많냐고 불평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차범근은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또 안좋게 해고된 전임감독으로서 자신을 미워하거나 불편해 할 법도 한데 경기 승리 후 축하 꽃을 보내는 등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며 역시 톱클래스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선수들과의 소통은 대부분 영어로 이루어졌다. 차두리는 독일어가 완벽해서 독일어로 소통했고(히딩크는 5개 국어를 했다), 그 때문에 선수들에게 말을 전하는 통역을 맡기도 했다. 월드컵이 가까워질 즈음엔 대표팀 선수들도 영어 실력이 올라 간단한 소통에 큰 무리가 없을 수준이라고 했다. 애초에 히딩크는 국제무대에서 뛰고 싶다면 영어를 배우라고 선수들에게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일부러 통역을 대동하지 않거나 통역을 시키지 않고 영어로만 말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결론


2002년을 신성화하며 왜 지금은 그때처럼 못하냐는 건 조금 맞지 않다. 2002년은 모든 상황이 월드컵을 위해 맞춰진 특수한 경우였다. 애초에 히딩크는 감독 선임과정에서 '전지훈련을 마음대로 다니고, k리그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질리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과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뒷받침이 됐기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던 건 사실이다. 현재는 그 때처럼 준비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국가대표팀도 그렇게 준비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오심으로, 운으로 4강을 이룬 것 역시 아니다. 월드컵을 앞둔 잉글랜드-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1-1/2-3을 할만큼 이미 국가대표팀의 실력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그 두 팀은 경기 시작전이나 초반은 우리를 얕봤지만 전반전에 리드당하면서 후반전은 풀스쿼드로 나왔고, 당시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후 히딩크에게 와서 한국이 너무 강해졌고 1:1 싸움에서 밀릴 정도여서 반칙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오심 논란 역시도 우리가 심판에게 특혜를 얻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심판 판정으로 인해 스페인-독일 전에서는 수비수들 대부분이 부상인 상태였다. 독일전같은 경우엔 원래 BEST 11로 뛰던 수비수 대부분이 없었다. 당시 골을 먹힌 것도 최진철 마저 부상으로 교체된 직후 이민성이 그 자리를 맡은 이후다. 실력이 충분했지만 이탈리아-스페인-독일이라는 나쁜 대진운, 잦은 부상과 휴식 부족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 등을 겪으며 더 힘든 경기를 치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당시엔 국가적 사명감과 엄청난 응원 열기 등이 홈 어드밴티지로 작용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히딩크는 당시 성적을 유지하려면 K리그를 육성하고 무엇보다 유소년 교육 시스템을 전면 개선 및 육성해야 하며 국가대표팀 내 위계질서, 인맥으로 인한 선발 등 관례가 사라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떠났지만 그게 얼마만큼 현실화가 됐는지에 대한 답이 현재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실망의 이유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 2002는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으며, 그를 기대하는 것도 맞지 않고 동시에 그를 과도하게 폄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2002는 '모든 국가적 역량을 투자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선례(세계적으로도)일 뿐(실제로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이와같은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 국가대표팀의 평균이나 기준점이 될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오랜 친구, 무한도전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