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지 10년이 되버린, 영원히 남을 그 1년에 대해
20살은 특별하다.
우리나라에선 조금 더 특별하다.
연나이 상으로 20살이 되는 순간부터 청소년이어서 걸려야 했던 다양한 제한이 풀리는 것은 물론,
대학을 바로 들어갈 경우 대학생이 되는 나이다.
"청춘"이라는, 수많은 말들이 따라붙는 그 마법의 단어를 획득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 "청춘"에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게도, 20살은 특별했다.
30살을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약 10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20살의 시간들은 가장 많이 떠올렸던 시간이었다. 20대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도, 괜시리 20대를 떠올릴 때면 20살의 서투름이 먼저 아른거린다.
20살의 시간이 엄청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겨운 시간들에 가까웠고, 아깝게 날려버린 시간들이라고 할 만했다. 스물의 나는 방황했고, 불안했고, 실망했다.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 앞에 방황했고, 나의 청춘의 형태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불안했고, 내가 마주한 20의 모습에 실망했다. 재수를 했거나 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던 건 아니기에 그들이 겪었던 불안의 시간만큼 고되지는 않았겠으나, 20살 때에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할만큼 내게 20은 기나긴 12년을 보낸 것에 대한 보상도 아니었고 성인으로서 즐길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영어공부를 하거나, 학점을 따거나,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오거나, 하다못해 운전면허라도 따는 것도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만한 발전은 조금도 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었고, 흔히들 신입생에게 기대하는 모습처럼 '신나서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수업은 빠지기 일쑤였고, 과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다가 부랴부랴 제출하곤 했다. 과 친구들과 열심히 어울리지도 않았으니 신입생 대상 수많은 행사들에서도 핑계를 대곤 자리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대되는 일들을 하지 않은 것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는 시시했다. 좋아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싶지도 않았고, 별로 맞지도 않을 친구를 '아싸'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수업들을 대충 대하는 것도 '그들이 내가 열심히 들을 이유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노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부족했다.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그 때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을 잘 알지도 못하고 과소평가한 것도 있었고, 게으른 것을 수업의 탓으로 돌린 것도 있었다.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괜시리 도망쳐놓고는 허세를 부린 것에 불과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땐 그랬다. 혼자서 고고한 척, 수많은 것들을 쳐내고 있던 때였다. 사실 어쩔 줄 몰라 발버둥을 치는 존재였음에도.
그 이유는 여럿이었다. 먼저 진학하게 된 대학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내 수준은 훨씬 더 높다고 생각했고, 실패를 해서 억지로 들어왔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실제론 반수 준비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냥 다시 수시원서 넣고 하면 되지 않겠어'라고 대충 생각하기도 했다. 적당히 거부하고, 놀고, 이런 것이 '청춘'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20의 새로운 삶에 충실하는 이들을 보며 '청춘은 그런 게 아냐... 역시 이 낭만이 죽은 세상에서 나 혼자 청춘을 좇고 있네'라고 대단한 척을 했다. 기실 그 대단한 청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황을 청춘의 모습으로 치부하던 때였다. 그런 나이브한 20살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걸 몰랐다. 학교를 째고 PC방을 간다든지, 날씨가 좋다는 이유로 수업을 빼먹고는 사진을 찍으러 간다~는 일들로는 청춘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몰랐다. 사실,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실패를 하기도 했다. 20살의 시작과 함께 출발했던 연애는 보기좋게 얼마가지 않고 어그러졌고, 거기에서 상처입은 맘을 달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하던 활동을 스물에도 이어가려던 시도는 보기 좋게 엎어졌다. 수많은 회의를 해도 갈 길을 잃을 뿐이었고, 함께 준비하던 이들은 알음알음 멀어졌고, 그 실패를 외면한 채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여러 가지에서 실패를 겪은 나는 무언가에 도전할 마음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또 다시 본인을 증명하려 들었다가 '정말로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구나'란 걸 알게될까봐 두려워 했으리라. 그러니 자기 방어기제를 꺼내들고 수많은 상황들을 피하기만 했을 뿐이다. 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저기가 이상한 것 뿐이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름에 20대 언론에 지원해 들어가게 되고, 3주간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다녀온 뒤에 편의점 알바라도 시작하면서 그나마 상태가 나아졌다. 어쨌거나 무언가에 지원해 합격을 하면서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친구 한 명과 돈 없이 불쌍하게 3주간 유럽을 다니며 성숙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주말이나마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세상에 대해 배우기도 했고, 더 여유가 생긴 만큼 다양한 시도를 할 수도 있었다. 상반기 동안 겪었던 열등감에서도 어느정도 벗어날 만큼 시간이 흐른 것도 있었다. 침잠하기 바빴던 20살 전반의 시간과 달리 후반은 그래도 '봐줄 만한' 상태였던 셈이다.
그렇게 스물을 보냈다. 남다를 것 없는 스물이자 수많은 실패로 얼룩졌던 시간. 흔히 말하는 '청춘'과도 거리가 멀었고, 대학생활을 즐기는 철없는 젊음도 아니었다. 자기계발이나 공부로 시간을 채우지도 않았고, 모든 것은 어중간하거나 부족했다. 놀지도, 열심히 살지도 않았던 애매한 시기.
어느 스물의 봄 날, 학교 행사는 다른 핑계를 대고 빠졌다. 다른 곳에서는 학교 핑계를 대며 빠졌다. 그 밤의 시간을 10대 친구 2명과 보냈다. 어느 가게인지 기억나지 않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건대주변을 방황하다가 치킨을 사서 뚝섬유원지로 갔다. 치킨을 포장할 때 이미 시간은 새벽이었고, 거리는 술에 취한 이들과 클럽 앞에서 웅성거리는 이들로 가득했다. 편의점에서 가벼운 술을 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뚝섬유원지는 조용했다. 지금처럼 사람이 많은 핫플레이스가 아니기도 했고, 이미 깊은 새벽이라 그러했으리라. 보드연습을 하는 누구인지 모를 이들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조용히 흐르는 한강 물 앞 돌에 걸터앉아 적당히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에도 술을 즐기지는 않았기에 맛만 보고는 나머지를 한강에 쏟고, 유원지를 나와 또 어딘지 모를 곳을 함께 걸었다.
그러다 눈 앞에 들어온 목욕탕에서 함께 씻고는 갑작스레 다음 날 아침 조조영화를 예매했다. <어벤저스 1> 이었다. 씻고 나와 정리한 뒤 뜬금없이, 전여자친구에게 다른 번호로 그가 좋아할 만한 정보 문자를 전송하고는 잠시 잠에 들었다(건축박람회 입장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왕십리로 영화를 보러 갔고, 상영 전 남은 시간에 함께 컵라면을 먹었다. 시작하고 나서 5분 뒤에 잠든 나는 중간에 헐크가 로키를 붙잡고 패는 장면에 터진 사람들 웃음소리에 실없이 깼다가 영문도 모르고 함께 웃고는 5초 뒤 다시 잠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는 끝났고, 다같이 나와 친구들은 각자의 갈 길로 헤어졌다. 나는 또 다른 친구에게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왕십리에 남아 역 앞 벤치에서 밤을 새 피곤한 정신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뒤에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하루가 닥쳐왔고, 그 격차를 억지로 따라가며 남은 시간을 마무리했으리라.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고, 10대의 연장이었던 시간이었다. 계획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자그마한 계획일지라도 그대로 굴러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좌충우돌 되는 대로 몸을 맡기고는 그 방황을 무시하거나 즐기는 척을 했다.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밤을 새는 일이 있었고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대부분 적응하기 힘든 현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밝아진 날, 전 날의 피로를 안고 시간을 보낸 이에게 쏟아지는 강렬한 햇살과 분주한 사회는 괜시리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 내게 스물은 그런 시간으로 기억되는 때였다. 12월 군입대를 떠밀리듯 결정하고, 3월 입대 전까지는 더 편한 마음으로 놀았으나 그 3개월은 여전히 열아홉의 연장이었던 스물의 연장이었고 그렇게 나는 스물을 마치고 군대로 떠났다. 스물이라는 막을 내리고는 새 삶을 살아야겠노라고 다짐한 건 그 뒤의 일이다.
그 애매하고 부족했던 스물의 시간이 계속 떠오르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스물과 청춘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던 내 기준엔 턱없이 모자른 스물이었는데 20대를 꼬박 10년을 채우길 앞두고 있는 내게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20대를 떠올릴 때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스물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스물의 시간이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란 걸. 성취를 이뤘던 한 해, 인생에 남을 여행을 했던 한 해, 많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한 해, 아팠던 한 해... 더 강렬한 시간들을 밀어내고는 언제나 '과거' 혹은 '나의 젊은 날'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기억이 될 것이란 걸.
내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는 것이 불과 며칠도 남지 않은 지금에야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 시간은 성취나 성공으로 유의미해지는 것이 아니고, 부족했기에 그 가치가 인정되는 아주 독특한 순간이란 걸 말이다. 그건 이미 낡아버린 '청춘'론을 들먹이거나, '가장 젊은 날이 가장 시린 날' 따위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스물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스물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았기에 나는 괴로워야 했었다. 모든 이에게 스물이 특별한 것이니 그 스물을 소중히 여기라-는 시답잖은 얘기에도 관심은 없다. 스물은 특별하지만, 그렇다고 애지중지할 필요는 없다. 그 애지중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시간을 미워하게 되니까.
내게 스물은 특별한 시간이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해서도 아니고, 길이 남을 성취를 이뤄서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 '잘 보냈다'라고 할 만한 수준이어서도 아니다. 20대의 시작이라며 덕지덕지 의미를 부여했던 날들에 대해 철저하게 배신을 했거나 당했던 시기였고, 제한만 풀렸을 뿐 하는 행동은 열아홉의 연장에 불과했던 때였다. 그저, 내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특별하다. 물론 모든 과거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으나, 내 스물의 시간은 나라는 인간이 세상에 갑자기 던져졌을 때, 인생 처음으로 실패들을 맛보았을 때, 자신에 대해 회의를 품었을 때, 끝없이 실망과 자기혐오를 하면서도 '이것도 청춘'이란 말로 위로를 하려 했을 때가 모인 시간이기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나는 어느정도 세상을 배웠고, 여러 실패들도 해보았고, 자신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청춘'이란 말로 본인을 위로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보다 재미없게 본인에게 다가온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내게 스물은 담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겉으론 멀쩡해보였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끝없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새로운 경험들에 폭풍이 치고 있었다. 이제 내게 처음의 경험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또 처음을 겪어도 그 때처럼 휘말리지 않을 중심도 어느정도 세웠다. 그렇기에 스물처럼 흔들리고, 스물처럼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물은 부족했던 시간이었고, 그 부족했던 스물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내세울 게 없어 부끄러워했지만, 그 부끄러움의 시간은 삶에서 그 때 뿐이었고, 그걸 알아차린 지금에야 스물의 의미를 배운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가서 스물에 대해 조언하거나, 해묵은 '스물론' 혹은 '청춘론'을 꺼내고 싶지 않다. 그저, 그렇게나 좇았던 '론'들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스물의 시간에 대해 발견하고, 이제서야 그 시간들을 쓰다듬을 수 있게 됐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날 것의 시간들에게 오로지 나의 시각과 관점으로 그 땐 그랬다. 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다른 단어들을 가져와서 그 잣대로 보지 않고 그 시절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10년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그러니 이제서야 나는 내 스물에 대해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간들 내내 난 단 한 번도 내 스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부족하고, 못난 시간이었다. 아쉬운 시간들이었고, 후회되는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왜 그렇게 살았나요-라고 따져묻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10개에 이르는 연도 중 가장 이질적인 시간이었고, 그동안 나는 '스물처럼 살지는 말아야지'라고 되뇌이며 살아왔다. 스물의 시간을 망쳤다고 여겼고, 어디 내놓기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저 수많은 일들 앞에 당당히 서기엔 아직 나약했을 뿐이고, 또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그저, 스물의 한 해였을 뿐이다.
그 때 믿었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은 지금은 믿지 않는다. 그 때 시시때때로 만났던 친구들 중 지금도 연락을 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 그 때 생각했던 것들 중 대부분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우스운 수준이기에, 그 때 했던 생각과 아주 다른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살아간다. 하지만 그 스물과 지금의 나는 아주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워했지만 계속 떠오르는 그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스물이 있었기에 지금 스물아홉의 내가 살아서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는 걸 지금은 믿는다. 스물을 따로 떼어 '저 때는 이상했으니 빼두자'고 할 수 없음을 안다.
지금 내가 스물에 아쉬운 건 딱 하나 뿐이다. 그 시절을 왜 더 많이 기록하지 않았을까. 왜 더 많은 사진을 찍고 더 많은 글을 쓰지 않았을까(물론 그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이 자료를 백업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유실되었다는 굉장히 안타까운 사건이다). 내겐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당시의 증거들이 스물만 쏙 빼놓고 날아가 있고, 그만큼 스물의 시간은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혼자서 이곳저곳 다니던 시간들이 많아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들을 일도 별로 없으니, 스물은 더 신비로움만을 품고 있는 셈이다.
며칠이 지나면 한국식 나이로 나는 30이 되고, 누군가는 스물이 된다. 누군가는 스물을 지나 스물 하나가 될 것이고. 그간의 내가 그 모든 이의 '스물'에 관심이 있었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었다면, 20대의 끝자락에 와서야 나는 그 의미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애매한 나의 스물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스물을 마무리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러니, 이제 나의 다음은 스물 하나가 아닐까라는 실없는 생각을 굳이 활자로 옮기면서, 이제야 스물을 보낸다.
특별할 것 없지만, 특별한 나의 스물을 기록하기로 한 건,
그저 '이제서야' 마주하게 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1.
2012년 3월, 어느 과제의 일부.
결국 10년 뒤 저는 이성과 감성, 외향과 내향을 모두 갖춘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제 꿈인 언론인을 향해 계속 나아가면서도 소중한 가치를 소중히 여길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지금 20살, 10년이 지난 후 2022년에는 30살. 지금과 같은 열정과 패기는 부족하더라도 그 때는 지금과 같이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일이 없도록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면서도. 해밀의 의미와 웃는, 긍정적인 삶과 어릴 적의 여리고 따뜻한 가슴은 변하지 않은 채로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2. 2012년 3월, 어느 글의 일부.
태어나서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이들이 짜준 트랙에서 달리지만 말고, 그 트랙에서 달리고 있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진정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되돌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되돌아보기’에서 자연스럽게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질문과 그 답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청춘인지 아닌지를, 청춘이라는 말에 당당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 할 수 있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 좋은 말이다. 근데 자신이 <화려한 휴가>에서 나오는 고등학생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에 약을 발라줄 가치가 있는지.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보듬어 줄만큼 자신은 자신의 상처에 당당한지. 고민해보고 그런 ‘보듬어줌’에 감사하자.
(...)
다시 한 번 묻겠다. ‘청춘’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렐 만큼 자신 스스로에 당당할 수 있는가?
3. 2012년 9월, 어느 발표의 일부.
대학은 大學이다. 혁집의 말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위 ‘낭만’이라는 것일 수는 있다. 그 ‘낭만’이라는 것이 대학생의 지상 목표 취업과는 거리가 먼 것일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허나 무엇보다 현재 대학들이 가르치는 것이 큰 배움이 아니라는 점에는 확신한다. ‘진리의 상아탑’을 세우기는커녕 취업에 목을 매달았다. (...) 한국에서는 취업이라는 하나의 길만 강요하고 그 길만 보여줬지만 다른 길을 보고 싶다.
4. 2012년 6월, 어느 독후감의 일부.
그것은 내가 인문학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생을 졸업하고 10대를 졸업하기 전까지 학업이라는 것에 막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사회를 ‘가릴 것 없이’바라보기 시작하다 보니, 나의 눈이 너무나 어둡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20대라는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발을 내딛으면서, 나는 사회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풋내기에 부족했고, 사회는 그것들이 가득한 3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이 지배했다. 고등학교에서는 다들 ‘꼰대’라고 지칭하던 이들이 말이다.
5. 2012년 2월, 글쓰기 모임에 가져간 글의 일부.
20대는 완전해보였다. 혹은 20대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완전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사회적 제약이 없어진다는 것이 ‘이제는 넌 다 컸으니까’. 혹은 ‘완전해졌으니까’ 해도 된다는 의미인 것만 같았다. 20대의 고민은 20대여서 지니는, 불완전해서 지니는 고민이 아니라 오로지 사회가 만들어낸 고민인 것 같았다. (...) 허나 그렇지 않았다. 완전한 시기는 없었다. 10대는 10대 나름대로 불완전했고 20대는 20대 나름대로 불완전했다. 19년 간 살아온 인생이 사회적 제약이 풀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간 살아온 경험과 지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 난 나도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10대 때 그랬다. 허나 이제는 20대도 그렇다고.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그렇다고. 원래 삶은 불완전한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6. 2012년 5월, 20대 미디어 '고함20'에 냈던 지원서의 일부.
기사를 쓰는 저를 통해, ‘진짜’ 20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주변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살면서 보이는 20대는 이 때까지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단지 사회가 정한 길을 따라 가며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사회가 담아가는 20대의 이야기란 ‘엄친아’들의 ‘이렇게 해야 성공해!’라는, 20대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도층’의 이야기였습니다. 진짜. 99%의 20대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사회에 고하고 싶습니다.
7. 2013년 2월, 스토리콘서트 발언의 일부.
그렇게 작년에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사회에 발을 들인 20살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제 일상이 된 지겨움을 안고 사는 오스트리아의 사운드오브뮤직 가이드 누나, 본업은 따로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계신 교수 겸 건축가 할아버지. 그 외에도 현실관 맞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에 쭉 매달리고 있는 분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소위 ‘평균적인’ 길을 택한 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하고자 하는 일에 계속 매달려야 하나 고민하는 저.
어떤 걸 택해야 행복한 인생을 사는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들 덕택에 수많은 방식이 존재하고, 무엇이 더 좋은지 말하기 어렵단 건 알았지요. '난 무조건 좋아하는 걸 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난 불행해'라는 생각에서 '좋아하는 걸 이루려고 노력하면 어떻고 또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머무르면 어떤가'라는 생각이 된거에요.
제 제목이 "끝도 안보이는 짝사랑, 계속할 수 있을까요?" 였죠. 짝사랑이란 표현을 쓴 건, 아직 제 호, 제가 좋아하는 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