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잔인하고, 행복하고, 불행한 과정에 대한 처연한 기록
<룩 백>,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마주하는 영화를 봤다.
아래는 영화 <룩백>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룩 백>을 봤다.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이 요동쳤다. 1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탓일까, 영화는 초반부터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엎는다. 만화 천재로 으쓱한 후지노가 절망을 맛보고는 집에 돌아가는 길을 뛰어가는 장면에 속이 쓰렸다. 저 마음을 100%는 아니더라도,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난 그림엔 재능이 전혀 없다. 그런 내가 무언가를 '만든' 일이 있다면, 그건 글이다. 글을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나의 부족함과 마주하는 일이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 글이란 건 문턱이 낮기도 하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본인의 이야기를 잘 담아낸다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지노 만큼의 절망감은 아니었지만(나는 그렇게 1대1로 비교당할 일이 없었다), 어쨌거나 '나의 글'이 얼마나 부족한 글인가를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어린 시절엔 더욱 그랬다. 소설을 쓰겠노라고 까불던 시절, 선생님이 지적해준 부분들을 볼 때면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곤 했다. 그 내용도 아직 기억난다(등장인물이 '~하는 군'이라는 말을 하는 건 어색하다는 지적이었다)
동시에, 후지노가 같은 길을 신나서 춤을 추며 뛰어가는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칭찬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중학교 시절, 해리포터 팬 카페에서 매일같이 분석 글을 올리던 나는 여전히 그 때 받은 댓글을 기억난다.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칭찬이었지만, 그 칭찬은 하루 종일 괜히 실실거리며 웃음이 새어나오게 하는 한 줄이었다. 내가 열심히 분석해서 쓴 글이 누군가에게 이런 평가를 듣는다니, 정말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게 동기가 되어 나는 토론 게시판에 살았고, 중학생 때 카페 운영진이 될 수 있었다.
<룩 백>에서 가장 감명깊게 남은 대사는, 메인 대사가 아니다. 사실 '대사'도 아니다.
'만화를 잘 그리고 싶다면, 뭐라도 그려 멍청아!'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후지노는 계절이 지나도록 끊임없이 그린다. 그 '몰입'의 과정을 보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미쳤던 시절, 그것만 바라보는 그 몰입의 과정. 주변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라는 이야기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것만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고 마주하게 되는 시간들.
'뭐라도 그려 멍청아!'라는 말은 여전히 내게도 유효한 말이다. 잘하고 싶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시작도 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질 필요는 없다. 그 세계에 빠지지도 않고, 밖에서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그려라. 일단 그리면 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쓰자. 일단 쓰면 무슨 일이든 벌어진다. 게임 '카오스'에 빠졌던 시절, 공식 사이트에서 토론글을 쓰던 때에도 그랬다.
심지어 그 모든 경험들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해리포터를 주제로 글을 썼기에 게임 카오스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소설을 썼기에 고등학생 때도 소설을 쓸 수 있었다. 계속 글을 썼기 때문에 고등학생 기자단을 할 수 있었고, 교지에 글을 실을 수 있었다. 교지에 글을 실은 대가로 받은 문화상품권 5만원으로는 크레신 hp-500이라는 헤드폰을 샀다. 고등학생 기자단으로 라디오 인터뷰를 했을 땐 그 헤드폰을 끼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부끄러운 기억이다.
계속 글을 썼기에 기자라는 꿈을 꿨고, 고함20에 들어갔다. 부족했던 나는 '20살'이라는 나이빨로 '가능성 TO'로 고함20에 들어갈 수 있었고 수많은 이들의 글을 보며 반성하고 배우며 또 글을 썼다. 그렇게 20대 내내 글을 썼다. 그 글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글일 뿐이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어떨 때는 '꽤 썼네' 싶기도 하지만 꽤 많은 순간에 '뭐 이런 걸 썼지' 싶다. 그 모든 과정들을 '룩 백'을 보며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영화를 보며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쿄모토'는 후지노에게 묻는다.
그럼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려?
그 질문의 끝에는 쿄모토의 환한 얼굴이 나타난다. 내 만화를 사랑해주는 쿄모토가 있기에, '후지노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방을 뛰쳐나온 존재가 있기에 만화는 힘들고 귀찮지만 그린다. 수많은 콘텐츠들은, 그 콘텐츠들을 응원하고 사랑해주는 단 하나의 사람, 하나의 댓글, 하나의 칭찬을 원동력 삼아 만들어진다.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은 세상과 멀어지는 지난한 길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지날 수 있다.
쿄모토와 후지노가 눈밭을 헤치고 편의점에 갔을 때, 제발 좋은 결과를 빌었다. 어딘가에 글을 내고, 그 글에 대한 결과를 열어보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여기에 내 이름이 있기를, 내 글의 제목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흔들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 그 결과는 때론 좋았고 때론 실망이었지만, 후지노와 쿄모토에게는 좋은 결과였기를 애타게 빌었다. 그들이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 절망을 맛보는 마음을 너무나 알 것만 같아서. 그들의 절망을 보면 내가 겪었던 절망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글을 쓰다보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순간이 있다. 고3 시절, 요새는 '학종'으로 바뀐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하던 나는 나름 '내가 써온 글'들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이월드'를 다니다가 흔히 하는 말로 '스펙 끝판왕'인 친구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글 좀 쓴다고 해서 비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글 좀 쓴다고 까부는 동안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걸 이뤄냈고 심지어 공부도 잘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그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등감과 좌절감에. 내 옆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나는 저런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 그만둘래'라는 후지노의 말처럼, 벽은 높았고 나는 작았다. 내가 이룬 작은 성과들은 정말이지 우스운 것들이었다. 심지어 키도 크고 외모도 나보단 잘난 것 같은 그들을 보며 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더랬다. 그들은 나의 존재 조차도 모를텐데 말이다. 최소한 쿄모토는 후지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일도 없었다.
이제야 나는 안다. 세상에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많다 못해 널렸다는 걸. 나의 재능은 별 볼 일 없고 노력하는 재능도 그닥이라는 걸. 그래도 상관 없다는 걸. 그냥 나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면 된다는 걸. 글을 쓸 때는 그저 그 행위에 집중하면 된다는 걸.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 없다는 걸. 그저 쓰다 보면,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나름의 성과와 기적으로 내게 돌아올 것이란 걸. 하지만 그 때 19살의 나는 그 정도로 마음이 단단하지는 못했다. '룩 백'을 보며 비극의 시간을 보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당시의 내가 생각났다.
룩 백의 결말이 좋았던 건, 끝까지 결국 그리기 때문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냥, 하자. 세상의 풍파와 질시를 딛고, 개인의 상처와 아픔을 이겨내는 건 그냥 하는 것 뿐이다. 나의 콘텐츠를 사랑해줄 누군가를 위해. 누구보다 나의 작품을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나를 위해. 그러고 있는 우리의 등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를 이기겠다는 마음도, 대의명분도 필요 없이, 그저 나를 위해. 비극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위해.
룩 백은 슬픈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이토록 무언가를 만드는 10대의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이 있었을까? 후지노가 좌절하며, 또 신나서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야말로 룩 백을 보며 가장 마음이 흔들리던 때였다. 룩 백의 시간은 1시간 만에 끝이 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1시간 동안, 그 세상에 가장 몰입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세상의 수많은 후지노와 쿄모토를 응원하면서, 열등감과 질투에 자신을 부정하던 19살의 나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