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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무사 Mar 26. 2022

노무사에게 필요한 역량

역할에 대한 고민에서 역량에 대한 고민으로

'역할'에 대한 고민에서 '역량'에 대한 고민으로


공무원(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다 의원면직을 하고 다시 노무사로 복귀한 지 3개월가량이 지났습니다. 노무사로 일한 다는 건 그간 해왔던 조직생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직업 생활이다 보니 저에게도  적응이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기존과 다른 경험은 새로운 인사이트를 줍니다. 주로 조직생활을 해왔던 입장에서 '일을 잘하기 위한'고민은 대부분은 '역할'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리고 이 고민 중에는 조직 구성원이기에 해야만 했던 크게 생산적이지 않은 고민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직론을 공부해 보면 조직을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제가 했던 고민을 바람직한 방향의 고민이라고 볼 것입니다. 유기체인 조직의 한 구성(ex. 인체의 심장)으로서 제가 맡은 기능적 역할(ex. 혈액을 전신에 공급하는 일)을 잘 수행하는 것 이상의 고민은(ex. 심장이 소화를 잘 시키기 위한 역할을 고민)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노무사로 활동하면서도 '일을 잘하기 위한' 고민은 계속됐습니다. 다만, 고민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기존에는 '역할'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역량'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룹니다. 일의 시작과 끝을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수행해야 하다 보니 기능적 역할에 대한 고민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일의 일부를 훌륭하게 완수하기 위한 기능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일의 전 과정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한 역량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며 느낀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노무사에게 필요한 역량에 대한 생각입니다(짧게 3가지 정도만 언급하려 하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역량들이 필요하겠죠). 노무사라는 직업을 희망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노무사이다 보니 노무사에게 필요한 역량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일'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학습능력


노무사 일은 일과 학습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일이 곧 학습이고, 학습이 곧 일이 됩니다. 노동관계법령과 HR 지식은 개정되고, 연구되고, 고도화됩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을 학습해야 할 수밖에 없고, 학습을 하다 보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학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학습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을 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통섭의 식탁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님께서 유튜브에 나와 강연하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독서와 관련된 강연이었는데, 서점에 나와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책들은 통상 학계에서 10년~15년 전에 논의된 내용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금 거칠게 치환하면 학계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데 10년~15년 정도 걸린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노동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노동 분야는 학계에서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지 4,5년 정도만 지나면 현실에서 분쟁이 시작되고, 판례가 축적되기 시작합니다. 학계에서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생소한 법이론이 4,5년 정도 뒤에 하급심 판례의 판시가 되고,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됩니다. 이런 직업 환경에서 노동 분야의 전문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무사에게 학습능력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역량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학습능력은 현대사회의 모든 직장인에게 중요한 능력이지만, 노무사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기업 인사노무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는데, 요청받은 강의 주제에 비해 할당된 강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강의 시간이 긴 점에 욕심이 나서 통상 인사노무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보다 수준을 올려 강의안을 준비했습니다. 실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수준을 넘어 다소 학문적일 수 있는 내용까지 포함한 강의안이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렵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강의 요청자로부터 수강생들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제가 작성한 글(참고: 일 잘하는 직장인) 중 일 잘하는 직장인은 지적 과식을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피드백을 받은 뒤 정작 그 글을 작성한 제가 이를 간과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서비스 수요자들이 이 정도의 지적 과식을 한다면, 서비스 제공자인 노무사는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전달 능력


말이 전달되는 과정을 굳이 분해해 보겠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뇌에서 만들어지고,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듣는 이에게 전달되면, 듣는 이는 그 언어를 통해 말하는 이의 생각을 이해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하는 이의 최초 생각과 듣는 이가 이해한 최종 내용이 절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이가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그 손실이 발생한 언어를 듣는 이가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말의 해상도가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이미지의 질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해상도가 말과 결합되니 의아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쉽게 말하면 전달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말의 해상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최초 생각을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듣는 이가 이해한 최종 내용이 말하는 이의 최초 생각과 높은 비율로 일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의 해상도란 단순히 말의 유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창한 말 중에는 듣고 보니 알맹이가 없거나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는 이가 앞에서 분해한 말의 전달 과정 중 중간 단계에만 능숙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말의 해상도가 높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고, 듣는 이의 수준을 고려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의 해상도가 높은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사고력이 깊고, 상대방과 공감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 분야는 법률적, 경영학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요소까지 혼재된 영역입니다. 기본적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말의 내용이 어렵고, 감정적인 부분까지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뇌과학적으로 볼 때도 고차원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로 말을 해야 하는 노무사는 말의 해상도, 즉 전달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노무사의 저해상도 자문으로 인해 분쟁이 심화되거나 노무관리 방향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체력


일을 하면서 만화 미생의 대사가 떠오른 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성공하고 싶다면 체력을 길러라.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승부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무사의 일은 대부분 복잡하고, 복잡한 일을 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노무사는 갈등이 심한 당사자들의 사건을 다루는 경우도 있고, 갈등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에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그리고 노무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양의 학습을 해야 하는데, 많은 양의 학습 역시 에너지 소모가 큰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을 하는 노무사가 충분한 체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승부(=일의 결과 내지는 성과)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대부분 패배(=낮은 수준의 일의 결과물)로 연결될 것입니다.


체력이 노무사의 필수 역량이라고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체력이 육체적인 체력을 의미하는지는 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운동능력이 부족하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노무사로서의 일은 훌륭하게 수행하시는 분들도 봤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은 효율성 좋은 지적 하드웨어를 갖추고 있어서 적은 체력으로도 고효율을 낼 수 있는 예외적인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와 같은 보통 평균인이라면 꾸준한 운동을 통해 관리한 육체적 체력이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있을 까 봐 첨언합니다. 체력이 필요하다고 해서 노무사 일이 장시간 근로가 필수이며, 워라밸이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근로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밀도와 수준의 문제입니다. 저 역시 철저하게 9to6를 지키고 있고, 일의 주도권을 제가 갖고 있는 만큼 제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썼지만...


쓰고 보니 정말 당연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저 조차도 글을 읽어 보니 '전문직이 공부 잘하고, 공부한 거 잘 전달하고, 몸 튼튼하면 당연히 좋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단지 틀리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당연한 내용을 적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무사로 복귀해 일하는 동안 실제로 '내가 일을 더 잘하려면 이런 부분들을 키워야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세 가지 포인트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저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제가 사용하는 말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꾸준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제 일을 더 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일을 잘하고 싶은 분들 중에 혹시 예전의 저와 같이 '역할' 위주의 고민을 해온 분이 계시다면, '역량'에 대한 고민으로 관점을 바꿔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역할'에 대한 고민은 그 결과가 대부분 역할의 '수정'에 그치지만, '역량'에 대한 고민은 그 결과가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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