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만들어준 근사한 흰 머리, 그 머리와 색을 맞춘듯 어울리는 회색 모자와 원피스, 경쾌한 소리를 가졌을 구두와, 물건을 곱게 다루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한 흰 장갑, 꽃을 살 줄 아는 멋을 가진 엠마 할머니. 첫 장에 펼쳐진 그림만으로도 엠마 할머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할머니의 생일을 맞아 열명이 넘는 가족들이 선물과 함께 방문하지만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푸딩과 초콜릿 크림 파이를 굽고 꽃을 꽂아두는 할머니, 평소에는 주황색 고양이 호박씨와 햇볕을 쬐는 할머니, 나무 타기를 좋아하는 엠마는 가족들이 선물해준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시무룩해집니다. 할머니가 무엇을 그리워 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늙은 할머니를 그저 불쌍하게만 보는 가족들의 눈에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저 너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엠마는 결심합니다. 물감과 붓, 이젤을 사고, 자신이 보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갑니다. 그렇게 쌓인 그림들이 스무 점도 넘어갈 무렵, 할머니의 비밀스런 취미 생활을 알게 된 가족들은 외쳤습니다.
“잠깐만요! 감추지 마세요!”
“멋져요! 그림을 더 그려 보세요.”
그렇게 엠마 할머니의 작품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장이 위의 그림과 글입니다. 나이가 들고 홀로된 것이 불쌍하게 여겨지던 삶, 누군가가 와 주어야 생기를 찾던 삶의 모습이 바뀌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림이 부끄러워서 감추던 엠마의 그림이 달라집니다. 그림의 하단부에 또렷하게 새긴 이름, EMMA.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름이, 정체성이 흐려지는 시기가 옵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얼 하려고 하는지 잊은 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무언가 하려던 흔적만이 간간이 남아있을 뿐, 무엇을 하려했는지는 흐려진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막상 다시 하려니 그럴 의지도, 능력도 충분하지 않아보여서 그것을 하지 않은 마땅한 이유를 찾고,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엠마 할머니가 그림에 새긴 선명한 ‘자기 이름’은 저를콕 찌르는 바늘같았습니다. 나를 잘 안다는 이들이 만들어준 이미지와 말들, 요구되는 행동에 갇혀 진짜 내가 누구인지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때론 더 근사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때론 더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채근합니다.
여기저기서 엠마 할머니의 그림을 보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할머니는 또 혼자입니다. 우리가 잘 될 때는 꽃에 나비와 벌이 날아들듯 사람들이 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바람이 불고, 고독이 내려앉는 밤이 되면 홀로 흔들리면서도 견뎌야 하는 외로움을 우리 모두는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 순간이 바로 엠마 할머니처럼 저마다의 물감과 붓, 이젤을 사서 그림을 그리기 아주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차곡차곡 할머니의 집에 그림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 자신이 쏟아낸 진심들로 집을 단장합니다. 그래서 엠마는 예전처럼 오고 가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결정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