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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산책 Dec 25. 2020

까막눈 : 똑바로 보고싶을 때

글 최남주, 그림 최승주 <까막눈>, 덩키북스.

유치원이 끝나고 정이는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입니다. 뒤따라오던 민준이는 함께 간판 읽기 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정이는 민준이의 놀림 대상이 됩니다.


“너, 까막눈이구나, 까막눈”


정이가 태어나기 전, 할머니는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픈 뒤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이는 세상이 이리도 환하게  잘 보이는데 까막눈이라니. 집에 돌아와 정이는 할머니에게 안겨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가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니 눈물이 쏘옥 들어갑니다.


다음날 할머니는 커다란 달력을 펼쳐 커다란 공책을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색연필로 쓰기 시작하십니다. 옆으로 쭉, 아래로 쭉.


“기역, 이 글자의 이름은 기역이란다.”


기역, 니은, 디귿... 할머니와 정이의 글자 공부는 계속 됩니다. 할머니의 손 위에 포개진 정이의 손은 할머니의 마음과 지혜, 세상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를 흡수하며 자라납니다. 이제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앞으로 집에 올 때 길에서 본 글자들을 기억해서 할머니 손바닥에 써 달라고 정이에게 제안합니다.


 

매일와 슈퍼, 깍꾸뽁구 미용실, 잘났소 정육점, 미남 세탁소... 정이 덕분에 할머니는 마을 구석구석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정이의 손가락과 인내심 가득한 할머니의 손바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쳐 지나던 간판 이름들이 할머니와 정이의 손을 통해 살아납니다. 정겨웁게, 유쾌하게 새겨집니다.


 


“할머니, 할머니, 나 이제 동네에 있는 간판 다 읽을 줄 알아”
“그래? 우리 정이 이제 까막눈이 아니네!
“야호! 난 이제 까막눈 아니다! 우리 할머니도 깜깜한 눈 아니다!”


<까막눈> 저자의 할머니는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에 야학에 아기를 업고 다니며 글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이미 녹내장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셨지만 집 구석구석 집안일을 도우시던 할머니에게 글을 배운 기억이 이 그림책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눈이 깜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때로는 눈 앞의 진심도, 소박한 눈빛도 읽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정해두고 판단해버린 시력으로는 그 너머의 진심이 보이지가 않지요.


달라진 오늘을 칭찬받고 싶은 아이에게 지난 날의 잣대를 갖다대면, 지금 이 순간에 숨 쉬고 있는 아이의 소소한 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도 맞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은 우리에게 새롭습니다.


셀 수 없 반복하는 일출과 일몰이지만 그 웅장한 반복은 제게 한번도 같은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만난 그 아이로 판단내리지 않고, 지난번에 내게 상처를 주었던 그 기분을 남겨두지 않고, 오늘, 지금 내 앞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을 바라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할머니는 정이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 언어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정이는 그 안에 담긴 소리, 의미, 추억들을 들으며 삶을 배웠겠지요. 깜깜이 눈 할머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경험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알려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더 중요합니다.


깜깜이 눈을 가져 엉엉 울고싶은 이에게 커다란 달력 공책을 펼쳐 가만히 손을 포개어주는 사랑과 지혜가 있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옆으로 쭉, 아래로 쭉. 함께 그려나가며 눈을 열어주는 일은 어둠을 열어주는 별처럼 빛나는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언어 산책,

- 나는 언제 깜깜이 눈이 되나요?

- 나에게 할머니처럼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있나요?

- 할머니는 어떻게 집안 구석구석을 알고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 거울을 보고 눈에 보이는 내 표정, 그 이면에 숨겨진 마음을 적어볼까요?

- 세상에서 가장 눈이 깜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마음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 태도는 무엇일까요?


때로는 어두운 길일지라도, 언어는 등불이 되어 그대의 산책을 밝혀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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