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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Dyan May 11. 2024

봄날의 산타

2024. 04. 15.

과제가 하기 싫어 몸부림치던 어느 날이었다. 억지로 몸을 책상 앞에 앉혀, 다시 억지로 눈은 읽어야 할 것들을 향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인가. ‘억지로’를 거부하는 뇌는 간신히 눈으로 읽은 것을 요리할 생각이 없었으며, 손가락은 핸드폰을 향해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끊임없는 딴짓으로 내 수면시간과 과제의 진척도는 반비례 관계를 끊어내질 못했다. 그렇게 또 하기 싫어 병에 걸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에라 모르겠다’ 방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손가락으로 쓱 화면을 내리다 보니, 캡틴의 유튜브 녹화를 보러 간 팬들의 동영상과 사진이 잔뜩 보였다. ‘아, 오늘이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부러움을 그득그득 충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트위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뒹굴거리던 그때, 한 동영상이 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했다. 한 영상에서 나오는 캡틴의 말에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와, 누가 나한테 책을 보냈는데, 자기가 썼어!”


“저거 난데?!” 핸드폰 속 동영상을 바라보고선 소리쳤다.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폴짝폴짝 뛰었다. 중학생 때, 키스더라디오에서 사연이 읽혔던 그날처럼 흥분해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따뜻해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책을 선물로 보내는 것으로 나만의 출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선, 잠시 잊고 살았다. 연예인은 워낙 선물을 많이 받을 테니까, 내 선물도 그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래서 그대들도 수많은 선물 중 하나로 받고 넘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평범한 팬이 준비한 평범한 선물. 딱 그 정도라고 여겼었는데, 그대가 직접 내 책을 이야기해 주는 것을 들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내 선물이 특별했구나.


사실 마음 한편에는 특별하길 바랐던 욕심이 있었다. 팬질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그런 욕심 말이다. 나의 별이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인식해 주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평범하다’라고 나 자신에게 세뇌시키며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욕심에 찬 물을 끼얹어 식혔다. 기대하면 실망도 크니까, 난 내 책에 실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니야, 이건 그냥 평범한 선물일 뿐이야.’라고 쉼 없이 되뇌었다. 내가 기대로 방방 뜨지 않도록,  차분히 자리를 지키도록 마음 한편의 기대와 욕심을 눌러놓았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자, 기대와 욕심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대가 직접 내 책을 말해주는 그림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해 준 것을 보면, 그대에게 내 선물이 인상 깊은 선물이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동영상을 올려준 다른 팬도 그대가 감동한 것 같다고 말을 해줬으니까, 나의 과대해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대에게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준 것 같아 뿌듯하고 기뻤다. 잔뜩 늘어져있던 봄날의 어느 밤, 내 방에는 보드라운 열기가 올랐다. 그대의 말 한마디가 뿜어낸 열기를 타고 나는 구름 위를 걷듯이 둥둥 떠올랐다. 뿌듯함으로 꽉 찬 마음을 끌어안고, 손으로는 핸드폰을 꼭 끌어안은 채 웃음 지었다.


“하나는 한글, 하나는 영어. 그래서 주니가 영어로 그걸 읽어 줘.” 그저 책꽂이 어디 한편에 잘 꽂아놔 주길 바랐던 책인데, 캡틴이 그의 딸과 함께 보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벌써 그 작은 아이가 아빠랑 영어 책을 볼 정도로 컸다니. 역시 흘러간 시간을 체감할 때는 주변의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더 들이더라도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을 텐데. 이제야 깊은 아쉬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직역이 난무해서 원어민인 캡틴이 읽는 걸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 책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읽지 말고 그냥 책꽂이에 기념으로 꽂아놔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책을 캡틴이 딸과 함께 본다니, 기쁨과 설렘을 느끼기가 무섭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부끄러움은 잠시 뒤로하고선, 다른 동영상은 없나 찾아 헤맸다. 내가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오늘 캡틴이 한 말을 그리고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팬의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다시 놀랐다. “근데 진짜 그거는 너무 대단한 것 같아.” 이 한 마디가 앞서서 쌓였던 기쁨, 설렘, 부끄러움을 덮쳤다.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편에서 터져 나왔다.


“대단한 것 같아” 그대가 봄날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한 마디를 선물했다. 오늘 하루, 아니 이번 한 달의 모든 힘든 시간을 한 마디가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의 한 마디에 나는 저항 없이 행복감에 압도당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대단하다고 말해준 것이 벅찼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지만, 그대에게 인정받는 것은 특별하다. ‘대단하다’ 그 표현을 그대에게 들었다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30초 남짓의 짧은 동영상들을 보면 볼수록 감당할 수 없는 행복함이 쌓였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방방 뛰던 나는 곧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왜인지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감정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대의 말이 나에겐 홀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외로운 시간을 잘 견뎌 냈다는 토닥임 같이 느껴졌다. 그대의 한 마디로 외로웠던 시간은 곧 소중한 시간이 됐다. 기쁨과 고마움이 잔뜩 뒤섞여 눈꼬리에는 눈물이 맺혔다. 눈물이 맺힌 눈꼬리와 기쁨을 숨길 수 없는 입꼬리가 한 데 모인 얼굴을 하고선,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동영상들을 수없이 반복해서 재생했다. 봄날 나를 찾아온 산타의 선물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됐다.




자괴감의 요정에게 자존감 한 보따리를 선물해준 봄날의 산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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