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겁이 많았다. 놀이공원에 가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별로 없다 보니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놀이공원보다 동물원을 더 좋아했다. 누군가는 각종 롤러코스터와 놀이기구의 매력을 스릴이 넘친다, 짜릿한다고 표현하는데 나는 놀이기구의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었다. 겁이 많다 보니 도전과는 거리가 멀고 걱정과는 격이 없는 그런 사람이 돼버렸다. 모든 순간,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갖는 질문이 ‘~하면 어떡하지?’이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사람인데 나이가 들수록,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 놈의 겁은 점점 커지고 늘어나고 있다. 늘어나라는 배짱이나 재산은 그대로이거나 갈수록 줄어들면서 말이다. 정작 필요한 것들, 희망하는 것들은 정체기인데 겁은 상승기라니… 역시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음을 다시 느낀다. 그런데 뭐 겁이 많은 게 죄도 아니고, 사실 겁과 걱정이 많아서 늘 차선책을 생각하고 사전에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갖고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기 합리화일지 몰라도, 내 성격의 단점을 장점화한다면 그렇다. 미리 차선책을 생각해 두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흐르지 않더라도 그다음을 택하면 된다. 걱정을 하는 당시에는 수많은 가정을 떠올리고 판단하느라 머리가 아플 수 있지만, 미리 머리가 아팠던 덕에 현실에서 만나면 조금 덜 아프게 처리할 수 있달까? 그래서 나는 겁쟁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겁이라는 게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나의 시간을 적립하면서, 무한정 늘어난 것은 경계심과 걱정이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벽을 만들고 철조망을 세워 누구나 함부로 내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대외적으로는 “낯을 가린다.”라고 표현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계를 친다.”가 맞다. 나의 인간관계는 좁고 깊다. 그리고 좋고 싫음이 뚜렷하다. ‘하나만 판다’고 보일 만큼 마음이 맞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실없는 사람이 되어 퍼주기 바쁘고, 만나면 목이 아플 정도로 수다를 떨기 바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타인과는 거리를 둔다, 심하게. 나의 인간관계는 양파처럼 한 겹, 한 겹 신뢰도와 친밀함의 정도에 따라 층층이 분화되어 있다. 처음에는 저 바깥의 바스러지는 껍질이었다가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그 사람이 나와 잘 맞고,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면서 점점 안 쪽의 층을 내어주는 그런 방식인 셈이다.
어쩌다 이런 인간관계 방식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내성적인 성격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은 아니다 보니 첫 사회생활의 시작인 초등학교도 나에겐 쉽지 않았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동네 엄마들끼리 친하고 그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놀게 하면서 이미 친해진 채로 입학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워킹맘 밑에서 그렇다 할 친구네 엄마를 만난 적도 없는 나로서는 벌써부터 끼리끼리 모여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입학을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엄마,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라고 물었다. 그리고 엄마는 “안녕? 난 D야.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하며 다가가라고 답하셨다. 마치 영어 교과서 속 다이얼로그 같은 이 대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8살의 D는 그렇게 엄마의 말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 결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친구를 보았고 머쓱함과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것은 어린 D의 몫이었다. 아마 아직도 이 대화와 상황들이 기억나는 것은 그만큼 ‘이불킥’ 감의 이야기라서 잊히지 않고 계속 남아 있나 보다. 머리가 크고 나서 든 생각인데, 정말 저 답변은 엄마가 교사여서 가능했던 답변인 것 같다.
사람을 사귀는 시작점을 잘못 배워서인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렵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어떻게 친해지지?’라는 질문보다 내 머릿속에는 ‘나는 저 사람이 좋은데, 저 사람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저 사람이 날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다 보니 흔히 인연을 만나는데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는 말처럼, 나는 인간관계에서 수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하게 된다. 지내다 보면, 우연히 그 사람과 나의 공통점을 찾고 친해질 계기가 생기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양파의 중심층이 아닌, 껍질과 중심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늘 질문을 갖는다. ‘내가 저 사람이랑 친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내가 먼저 편하게 다가서도 될 만큼 친한 사이가 맞을까?’와 같은 질문들이다. 예를 들어, 마침 그 사람과 가고 싶은 전시회가 생겼는데 주말에 나랑 놀자고 해도 될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또는 무언가 재밌는 일 또는 화나는 일을 겪었는데 그냥 그런 일상을 공유하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카톡을 해도 될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워낙 경계를 갖는 사람이다 보니, 상대방도 그런 경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의 어느 경계에 속해 있는지를 알고 싶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그냥 내가 먼저 제안하고 연락하는 것에 거절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느끼지만 ‘거절’이란 단어는 참 묘하게 불편하고 어려운 단어다. 단어 자체가 내뿜는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양파 같은 나의 인간관계를 요즘은 즐기고 있다. 양파의 겉은 물러서 버려야 할지라도, 탄탄한 속은 골라 넣어 국물에 단 맛을 낼 수 있듯이 내 인간관계에는 그런 달짝지근함이 있다. 설탕의 단맛처럼 질리지 않는, 감칠 나게 그 맛을 돋우는 그런 단 맛. 깊고 편안한 나의 인연들과 함께 다음엔 또 어떤 맛의 즐거움을 요리해 낼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