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감사는 소비재가 아니다

by 다이안 Dyan

사과와 감사는 소비재가 아니다

취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사과와 감사를 아끼는 것’을 꼽겠다. 아낄 것이 없어서 사과를 아끼냐고? 돈이나 아끼지 왜 감사를 아끼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미안해’, ‘고마워’ 이 세 글자가. 아니, 존칭을 쓴다 쳐도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다섯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면 자신의 통장에서 획수당 10만 원씩이라도 출금되는 것 마냥 다들 어찌나 이 표현을 조심스러워하는지. 마치 사과와 감사의 문장은 말할 때마다 혀가 소프트 아이스크림 마냥 닳아서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 같다. 아니면 한 글자라도 타자로 치면, 손가락이 마디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걸까?


도대체 그럼 요즘의 직장인은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 보호”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인간관계의 진리가 돼버린 문장이 있지 않은가. “만만해 보이면 호구 잡힌다.” 많은 직장인 에세이, 인스타툰, 각종 짤 또는 문구 등등, 다양한 것들이 이 진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 그리고 우린 그것들을 보며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하루의 웃음을 채워 나가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떠나 각종 인간관계를 겪다 보면 누구나 깨닫는 것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진리라고 불릴만하다. 그 진리를 깨달은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기이한 현상이 바로, 사과와 감사를 최대한 아끼는 것이다.




이것은 초식동물의 보호기제일지도…

각종 글과 서적에서 말하길 자기 잘못도 아닌데 자주 사과하는 것은 자존감 낮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과를 하지 않게 된 것도 나의 자존감 레벨을 남들에게 알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 감추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상사의 지적, 동료와의 비교, 몰상식한 사람의 폭언 등으로 자존감을 갉아먹을 기회는 넘치고 넘치니까.

그렇게 낮아진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 사과의 빈도를 줄이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마치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초식동물의 모습 같달까. 호랑이, 여우, 늑대가 우글우글한 도심 속 콘크리트 정글에서 먹잇감으로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한 초식동물의 발악 말이다.


맑은 눈망울의 사슴은 푸른 숲 속의 연못에 삼삼오오 모여 목을 축이며 일상을 영위했다. 늘 하던 대로 하는 일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개를 숙여 목을 축이던 옆자리의 사슴에게 여우가 달려들었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나자, 주변의 너구리도 합세해 사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또 다른 사슴은 이제 연못을 갈 때면 꼿꼿이 목을 세우고 사방을 경계한다. 일상적으로 목을 축이려 고개를 숙인 것뿐이었는데, 그 찰나에 목덜미를 뜯긴 동료 사슴을 본 이후 사슴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계심만 가득하다.


내가 보는 사회생활이 그렇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같은 착한 마음씨를 일상에서 표현했을 뿐인데, 일부 여우와 너구리, 오소리들은 그런 착한 마음씨가 마치 무리 중 가장 약한 개체임에 대한 표징이라고 여겨 달려든다. 그렇게 본인이 겪던, 주변의 다른 착한 사람이 겪던, 결국 그 상황을 직접 또는 간접 경험한 이상 어떤 사슴도 그렇게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여리고 착한 사슴과 토끼는 경계를 높이고 가시 갑옷을 두르며 착한 마음씨를 꽁꽁 숨긴다.




하지만 자존심을 앞세운 뻔뻔함일 수도 있다

그치만 모든 사람이 사슴과 토끼 같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를 감추기 위해 사과와 감사를 꽁꽁 감추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에 익숙한, 잘못된 자기애와 오만으로 똘똘 뭉친 여우와 너구리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사과와 감사를 잊은 채 살아간다. 과연 사과와 감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고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제는 다시 사과와 감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먼 길을 떠난 존재인 것이다.


그런 포식자가 직급을 달고 있다면, 초식동물을 착취하기 바쁘다. 초식동물의 착한 마음씨와 예의바름을 약점 삼아 가스라이팅을 한다거나, 또는 잘못을 떠넘기기도 한다. 본인들이 먹이사슬에서 상위에 있기에 더더욱 사과와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하위의 존재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짓밟기라도 할까 걱정되서일까? 그렇게 상위 포식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법이란 없다.


산업마다, 기업 규모마다 중요한 시기는 다르겠지만 “성과평가”의 시기는 업종, 규모 불문하고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일 것이다. 개개인과 각 팀의 성과가 평가받는 시기. 그 결과에 따라 성과급과 승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만큼 모두에게 예민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전쟁 같은 시기에 니탓내탓하는 포식자들 사이에 낀 초식동물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묘사해 본다면, 모닥불 장작 한가운데 묶인 셈이다. 그리고 모닥불에 불이 붙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 불이 초식동물이 몸속에 가두고 있던 화에서 터지는 불이라는 것. 그만큼 그들의 횡포에 속으로 화가 쌓여 터졌었다.

다른 팀은 대리들이 맡은 각 팀의 성과관리 담당자 역할을 연차 순으로 입사 1년이 갓 지난 내가 맡고 있었다. 성과관리 담당자는 종종 다른 팀과 협의라 쓰고 언쟁이라 읽는 과정을 겪곤 하는데, 나에게는 체급부터가 다른 존재들과 하는 격투기 같았다. 도저히 게임이 안 될 것 같은 판에서는 코치인 팀장님에게 넘겨 코치 대 코치의 게임으로 유도하는 꾀를 부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노장의 코치들은 게임에 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고, 결국 늘 체급에서 딸리는 내가 아바타로 게임에 임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나의 화가 터진 것은 우리 팀의 성과 내용을 계약 담당 부서에서 성과 담당 부서로 전달하는 과정에서였다. 계약 담당부서의 대리가 데이터를 잘못 보내어 우리 팀의 성과 달성 값이 낮게 책정되었는데, 그걸 성과 담당 부서의 대리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확정 지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 팀의 성과 등급이 달라질 수도 있는 큰 배점의 지표였는데 제대로 확인을 하지도 않고 확정 지으려 하다니…부글거리는 화를 참고 정정하는 과정 속에서 두 포식자 대리는 한 마디 사과도 없었다.

계약 담당부서의 대리는 나의 선배 때부터 우리 팀과는 악연이 있던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우리 팀과 관련된 업무에는 더더욱 예민하고 엄격하게 굴곤 했다. 우리 팀의 실수를 찾아낼 때는 열과 성을 다하며 나에게서 죄송하단 말을 수없이 듣고 간 사람이, 정작 본인의 대형 실수에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쏙 내빼기 바빴다. 성과 관리 대리는 되려 왜 이걸 계약 담당부서랑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고 일을 크게 만드냐는 꾸지람만 늘어놓으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규정대로라면 정확성을 지켜내지 못 한 두 담당자로 인해 두 부서 모두 평가에서 감점을 받았을 것을, 미리 말해서 모면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담당자 ‘대리’들은 ‘대리’라서 본인들의 업무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실수를 ‘주임’이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치부하기 바빴다. 나는 나의 코치의 지시대로 움직인 링 위의 사슴 아바타였을 뿐인데 말이다. 왜 내가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되려 사과를 듣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되려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다른 팀의 성과가 잘못 입력되어 우리 팀이 낮은 평가결과를 받을 뻔한 것이면, 사과할 정도로 큰 실수 아닌가? 그렇담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생각해도 의문이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거꾸로 된 피라미드의 직장 생태계 먹이사슬

극강의 자기 보호가 팽배한 콘크리트 정글에 더 이상 사슴과 토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먹이사슬의 상위 동물이 되려 한다. 아무나 날 물어뜯지 못하게, 물어뜯기 쉬운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말이다. 그렇게 초식동물 없이 육식동물만 남는 콘크리트 정글의 생태계는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도 특정 먹이사슬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그 생태계는 붕괴된다고 한다. 자연의 법칙대로면 우리의 직장 내 생태계는 이미 위험한 수준이 아닐까?


우리의 직장 생태계는 이미 위태로운 역삼각형의 구조가 돼버린 지 오래이다. 신입으로 들어와서 3년 안에 초식동물을 탈피하는 기이한 현상은 이런 사회문화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럼 초식동물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냐고 물을 텐데, 한 때 초식동물인 사람으로서, 자기 화에 못 이겨 모닥불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르기도 했던 사람으로서 요구한다면, “초식동물이 억울한 위치가 되지 않게 해 줘!”

말끝마다 사과와 감사를 달고 사는 것은 다소 이상해 보인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 자체는 잘못도 아니며 죄도 아니다. 그저 착하고 예의바름의 정도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절대 만만하게 보라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초식동물의 외침은 늘 멀리 가지 못한 채 눈앞에서 부서져버리곤 한다.


오늘도 ‘내가 호구 같나’라는 고민으로 화가 치밀거나 때로는 울적해지기도 하는 초년생에게 전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보다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변화는 옳다. 하지만 자존감을 높이려다, 자존심만 앞세우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오늘도 남의 실수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의 실수에는 사과하지 않는, 포식자인 줄 모르는 포식자에게 전한다. 선함과 예의바름을 약점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유치한 질투가 만든 오판이다. 사과와 감사는 소비재가 아니다. 부디 마음껏 나누어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딴짓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