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살던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어 우리 가족은 봄맞이로 다 같이 꽃시장이나 화원에 가서 그해에 심고 가꿀 식물을 사곤 했습니다. 할머니께 다양한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키운 채소와 과일을 수확하며 자연스럽게 식물을 가꾸는 것과 친숙해졌습니다. "
취업준비생이던 때, 무수히도 많이 쓴 제 자기소개서의 도입부였습니다. 25살 무렵의 저는 식물과 평생 함께하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 자신했고, 확신했죠. 원예학 전공만으로 끝냈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랬다면 4년으로 대학교를 칼졸업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쉽게 가지 못했어요. 결국 세 번의 복수전공 신청 끝에 조경학을 졸업장에 넣을 수 있게 됐죠.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복수전공으로 학교를 2년이나 더 다녔으니, 대학에 투자한 시간과 등록금만 해도 꽤 컸죠. 그뿐인가요? 식물을 가까이서 알아가고 다룰 수 있는 가드너가 되고 싶다고 또 일 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는데 투자했으니 도합이 7년입니다.
사실 이런 시간과 노력의 투자를 논하기 전에, 이미 제 머릿속에는 ‘전공’이니까 그에 따르는 직업과 직장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결론이 지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마치 빗방울이 중력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전공의 길을 걷는 것이 순리이자 진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원예학과 조경학 전공자는 식물원의 교육생, 비영리단체의 활동가, 공공기관의 조경직으로 약 십 년 가까운 시간을 식물과 함께하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연봉, 노후 대비, 내 집 마련 같은 현실 앞에 무너졌습니다. 저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어른이 돼가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7년의 배움도, 3년의 짧지만 다채로운 직장 경력도 깨부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요. 딱 일 년이었습니다. 그 일 년의 시간 동안 깨끗이 단칼에 자르지는 못했어요. 다시 돌아보니 미련이 남아서,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배운 전공이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전공을 맴돌며 질척거렸지만, 결국은 끝냈습니다. 그렇게 전공의 길을 벗어나 지금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어요.
그런데 참 고집스러운 인간이라서, 직장과 하는 일은 바꿨어도 미처 지우지 못 한 것이 있어요. 처음 직장을 찾을 때 마음먹었던 다짐 말이에요, 그걸 잊지 못했어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직접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식물과 관련된 무언가를 할 거야. 내 전공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함축적으로 담을 수 있는 독일의 정원사이자 육종가의 말을 찾아 제 직업관으로 삼았거든요. “삶, 생명은 늘 푸르다.” 제가 끝까지 지키려 하는 마지막 한계선이 된 문장이에요.
그렇게 푸르렀던 시간을 보내면서 식물 그리고 자연과 함께 만든 기억이 참 많았어요. 한 식물의 매력을 알아가기까지의 시간도 있고, 그 식물과 함께 보낸 추억도 있고, 식물을 바라보면 연상되는 이미지들도 있고. 몰랐었는데 식물과 자연을 기억하는 저만의 방식이 생겨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삽 대신 펜을 들고 이어 나가기로 했어요. 전공자의 미련을 담아 이렇게 글로 식물을 그려내기로요.
이런 글을 왜 쓰나 싶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래서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