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조팝나무 : 내가 그린 구름 그림

by 다이안 Dyan

누군가는 엄마 뱃속의 시간을 잠시라도 기억할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다는데, 나에겐 그에 대적할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기억을 빠르게 뭉개는 것. 한 자릿수 나이의 기억은 참 이상하게도 내 나이가 같은 한 자릿수임에도 불구하고 늘 흐릿했다. 일곱 살일 때에도 엄마나 할머니가 네 살, 다섯 살 때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 내 기억인지, 이야기를 듣고 그 장면을 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희한하게도 기억이 좋지 않았던 내가 내 기억의 일부로 자신하는 장면이 있다. 내가 4살 또는 5살쯤, 한 살 어린 동생의 티셔츠를 예쁘게 만들겠다면서 동생이 입고 있는 티셔츠의 밑단을 가위로 잘라 태슬 장식을 만들어 버린 것. 그리고 상황을 엄마에게 약간의 놀람과 조금의 재미로 전달하시던 이모할머니의 모습. 그것이 흐릿한 나의 기억 속 가장 또렷한 한 가닥이다.


하지만 나의 파격적인 가위질은 동생을 괴롭히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디자이너’의 뜻도 모르는 꼬맹이가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며 벌인 발칙한 에피소드였을 뿐. 뒤죽박죽인 나의 기억 속에서 그 무렵의 내 장래 희망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서울 멋쟁이였던 친할머니와 앙드레김 패션쇼와 인터뷰를 열심히 보고 나면, 스케치북 가득히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을 그리곤 했었다. 그렇게 꼬맹이 때부터 타오르던 창작의 욕망은 꺼지는 법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좋아하던 아이돌을 주인공 삼아 각종 이미지 작업을 하면서 알음알음 포토샵을 배웠다. 아이돌 팬 모임에서 일종의 명함이라 불리던 홍보물을 엄마 몰래 밤을 새우며 디자인했다. 화면으로만 보던 것을 실물로 만났을 때의 뿌듯함이란. 거기다 내가 만든 것을 받은 이들이 칭찬과 감탄을 해줄 때면 속으로 몇 번을 폴짝폴짝 뛰었다.



수능과 입시로 꺼진 줄만 알았던 나의 창작 욕망은 대학교에 와서 다시 그 불씨를 피우기 시작했다. 식물을 중심으로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는 ‘조경학과’라는 곳을 알게 되고 나서였다. 내가 상상한 공간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설계의 매력에 빠졌다. 조경학과에서 한 설계 중 가장 현실로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 아파트 단지의 공간 설계로 진행했던 “구름 위의 휴식”이다.


식물을 활용하는 식재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구름을 최대한 식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도면에 그렸던 것이 이팝나무와 조팝나무였다. 이팝나무는 뭉게구름 같은 적운형 구름을 묘사하는 역할이었다. 요정의 날개같이 얇고 하얀 꽃잎의 이팝나무꽃은 나무 가득히 뭉쳐 피어나곤 한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나무 위에 구름이 꽂힌 듯했다. 작은 꽃이나 잎은 멀리서 보면 그 섬세한 질감이 돋보이곤 하는데, 이팝나무의 꽃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가녀린 네 갈래의 하얀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그 질감을 풍성하게 한다. 그렇게 나의 머릿속에 꽂힌 이팝나무 너의 모습을 그대로 도면과 콜라주 이미지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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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가 뭉게구름이었다면, 조팝나무는 얕게 깔리는 층운형 구름이었다. 마치 티슈를 길게 찢어 놓은 듯한 그림이다. 아파트 울타리 또는 공원 보행로를 따라 길게 심어진 조팝나무에 하얀 꽃이 가득 피면, 하얗고 긴 구름이 얕게 깔린 듯하다. 사방으로 휘어 난 가지에 옹기종기 붙은 작고 하얀 꽃은 가지의 몸짓에 가벼움을 더한다. 꽃잎을 날개 삼아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반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가지에 튼실하게 모여 핀 하얀 꽃송이를 보면, 잘 튀겨낸 핫도그 같기도 하다. 그렇게 통통한 조팝나무의 가지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팝나무 너의 팝콘 같은 하얀 꽃은 이팝나무가 만들어 내는 구름보다는 또렷하고 밀도 있는 구름을 만들어 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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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옷자락을 자르던 꼬맹이는 그렇게 꿈의 아파트 단지를 그림으로 그려 냈다. 그렇게 내가 만든 꿈의 단지는 폭신한 구름으로 뒤덮여 아파트 어디에서 쉬어도 구름과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을 담았다. 나무로 구름을 표현하고선 물에 비치는 하늘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수변 공간을 만들었다. 구름 모양을 단순화한 하얀 벤치와 구름이 내린 비를 표현하는 분수대까지. 아이들은 여름이면 광장의 분수에서 구름이 만드는 비를 쫓으며 놀 것이었다. 맑은 날이면, 거울 같은 연못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그린 구름 그림은 여름을 향하는 어느 봄날, 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시원한 바람처럼 청량한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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