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을 거슬러

by 다이안 Dyan

상경계 졸업자의 이력서 100개를 넣어도 서류 합격은 손에 꼽는다는 푸념을 보면, 농학계열인 원예학과 조경학을 공부한 나는 그들의 푸념조차 부러웠다. 지원할 수 있는 회사가 100개나 된다니, 나는 열 손가락만으로도 가능한데 말이다. 곧 사회진출을 앞둔 예비 졸업생들에게 연봉과 네임밸류는 포기할 수 없는 요소다. 그래서 두 가지를 충족하는 범위는 최저가 중견기업이고 최고가 대기업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좁아진 범위 안에서는 나의 전공인 원예와 조경을 살려 지원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건초더미 속 바늘 찾기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원예학과와 조경학과 모두에서 유독 공무원과 공공기관, 공기업으로 빠지는 비율이 높다. 공공의 영역은 일단 네임밸류를 갖췄고, 연봉은 낮더라도 정년까지 벌 수 있다는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나름 최선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분야에서 최선의 선택지인 공공기관에 취업했을 때, 이제 다 끝냈다고 생각했다. 최종 합격을 알리는 페이지가 마치 게임에서 최종 단계를 끝내면 나오는 페이지 같았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경제적 독립을 이룬 진짜 성인으로서 어떻게 인생을 즐길지만 생각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결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그때,’로 여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조경직으로 입사했으니, 당연히 조경 업무가 주요 업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조경은 부(附)요, 서류와 행정 업무가 주(主)인 주객전도를 마주했다. 당시의 나는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자아실현과 내 꿈이 더 소중한 20대였다. 그래서 ‘아니면 때려치우면 돼지!’라는 용기로 내 전공과 직렬에 맞는 업무를 달라며 반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공공에서 누가 그래”. 전공과 입사한 직렬대로 변함없이 일하는 것이 특수한 경우라고 했다. 더불어 언제, 어느 팀으로 가서 어떤 업무를 담당할지 모르니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그것이 이 세계의 중력의 법칙이었다. 결국 몇 번의 요란법석을 떨던 끝에 나도 그 법칙에 순응하기로 했다. 직장의 안정성과 급여, 복지처럼 남들과 똑같은 우선순위를 만들고, 점점 내 생각을 지워갔다. 이 세계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체념으로 만든 평안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임 나부랭이에게 지워지는 대리·과장급의 업무 그리고 책임. 돌발성 인사 발령으로 갑작스레 상승한 차석이라는 팀 내에서의 위치. 매번 주어지는 생소한 분야의 업무를 이해하기 위한 나 홀로 공부의 시간. 그 시간 속 모든 것이 날 짓누르며 숨이 막히게 했다. 문제가 있어도 순환 근무 주기로 인해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떠나기 전까지 회피하기 바빴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기에 나는 점점 외로움을 키워갔다. 흘러가는 시간 속 우울이 날 젖게 하는 줄도 모른 채, 울고 싶은데 울 시간도 없는 그런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우울은 삶에 대한 고찰을 동반했다. 그 순간 익숙하다고 생각한 것이, 익숙해서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물음표가 됐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건가?’



중력에 적응하는 방법이 포기와 체념뿐이라고 생각하며 가라앉던 그때, 새로운 관점과 넓은 시야가 기포가 되어 나를 다시 둥실 띄워 올렸다. 한때 머리를 쥐어 싸매며 혼자 공부했던 산업안전, 성과관리라는 낯선 분야가 이제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문이 됐다. 전공인 원예와 조경만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우직함에 유연성이 생겼다. 전에는 현장의 아저씨들과 일하기 위해 내성적인 모습을 감추고 씩씩한 척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젠 나는 누구에게든 그에 맞춰 적합한 가면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 거라 여겼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하고, 시야를 넓히니 내가 가꿔야 할 ‘나의 삶’이라는 숲이 보였다. 전공과 직장이라는 나무 하나만 올려다보며 눈물짓던 날에도, 나의 숲은 항상 바람에 살랑이며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걸 몰랐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내가 꿈꿨던 모습으로 내 숲을 가꿔나가기로 했다. 그날의 다짐과 함께 새로운 분야로 향하는 오솔길들을 만들어 문을 달았다. 오늘도 나의 취향으로 내 숲을 채워나가고, 알록달록하게 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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