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옷장 속 기본 아이템_2020-2021 F/W_상의
밤새 쌓였다 녹은 눈으로 도로가 까맣게 빛난다.
출근길에 이마가 시렸지만 오늘은 기어이 롱 패딩을 세탁소에 맡기고 오는 길이다. 바깥공기는 아직 차도 옷장 속 시계는 항상 저만치 앞서 간다.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얇은 봄옷도 한 번씩 손에 잡아본다.
매장 한 켠에서는 시즌오프 세일을, 쇼윈도에는 ‘2021 S/S 신상’을 진열하는 생태계는 한 계절을 채 기다리지 않는다. 이 사이클이 파생하는 막대한 양의 잔해를 잊고 살던 때의 나는 ‘즐기는 자’의 위치를 마음껏 누렸다. 사고 싶은 옷과 꼭 사야 할 아이템을 리스트업 하는 뿌듯함도 있었다.
하지만 소비 요정과 잠시 떨어져서 지내기로 한 요즘, 나는 좋은 옷을 고르는 눈썰미를 집에 있는 ‘보물찾기’에 쓰는 중이다. 작년 10월 즈음부터 국내외 패션 유튜브 채널에서 2021 S/S 트렌드를 찾아볼 수 있었다. 당분간 옷 관련 소비는 하지 않기로 했어도 이런 트렌드를 찾아보는 재미는 여전하다. 올해 유행하는 색깔, 소재, 실루엣이 대중의 무엇, 지금의 무엇을 반영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발견한 그래픽 티셔츠. 엄마의 두꺼운 겨울 옷들 사이에 티셔츠가 하나 걸려있어 꺼내봤더니 검은 바탕에 손으로 낙서하듯 그린, 누가 봐도 샤* 향수가 그려진 귀여운 티셔츠였다. 반소매 티셔츠를 추운 겨울에 입을 방법은? 레이어드다.
그래픽 티셔츠는 지금부터 당분간은 쭉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스트릿 무드가 강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이 자주 가는 아이템일수록 소재를 꼼꼼히 보고 마음에 드는 걸 하나 잘 고르는 게 좋다. 면 티셔츠는 톡톡한 재질에 목둘레 마감이 탄탄해야 오래 입을 수 있는데, 만져보니 딱 그랬다. 엄마랑 나랑 통했구먼!
티셔츠에 스트라이프 셔츠를 레이어드하고 모직 팬츠까지 블랙 앤 화이트 콘셉트로 입어봤다. 여기에 포인트 컬러로 버건디색의 페도라와 메리제인을 매치해서 통일감을 주었다. 버킷햇과 스니커즈가 대세인 시대에 페도라와 메리제인이라니, 아무래도 나는 “쏘 올드 훼션드”.
힐은 이제 너무 높고, 모자는 유행이 지나서 엄마는 잘 걸치지 않는다. 여전히 예쁜 녀석들. 줄곧 컴컴한 장 속에 갇혀 지내다 ‘내 눈에 들어 이렇게 바깥공기를 쐬면 이 친구들도 오랜만에 즐겁지 않을까?’라는 ‘물아일체’적 공상도 해 본다.
세탁을 맡긴 롱 패딩 대신에 반코트 길이의 에코 퍼(eco fur)를 걸쳤다. 음, 여기는 이 퍼 코트가 딱이었다.(그간 추위 때문에 롱 패딩과 너무 한 몸으로 지냈나 보다.)
오늘 코디의 개인적인 만족도는 90% 완성도는 85% 정도 - 셔츠 소매를 너무 정직하게 그대로 두었다. 롤업은 아니라도 소매를 적당히 걷어 올렸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이만 쓰려는데 메리제인 슈즈 안에 신은 양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조금만 더 수다를 떨어본다. 검은 바탕에 노란색 치타가 그려진 이 양말도 사실 티셔츠와 깔맞춤을 위한 큰 그림의 일부였다. 모직 팬츠와 같은 검은색으로 통일해 다리가 더 연장되어 보이는 착시효과도 있다.
식물성 오가닉 소재를 사용하는 친환경 브랜드 “그린블리스” 양말은 내가 아끼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다. 브랜드 취지도 좋지만 양말의 패턴이나 색감도 참 예뻐서 자꾸 모으게 된다. (앞/뒷 광고 그런 거 없이 순수 팬심으로 남기는 코멘트...!) 이런 브랜드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