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021F/W 시즌 마무리
그동안 'Mom's Closet'에서는 옷을 주로 다루었는데 실은 신발도 꽤 등장했다. 그래서 지난가을-겨울 시즌을 마무리하며 오늘은 신발만 따로 모아 다루어 보려고 한다.
안 여사는 힐을 참 즐겨 신었다. 온갖 종류의 구두를 보며 자란 탓에 미미인형에게조차 스무 켤레가 넘는 슈즈 컬렉션을 만들어준 나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그날 입은 옷과 딱 어울리는 힐을 골라 신고 집을 나서리라 상상하곤 했다.
안 여사가 그렇게 드레스업하고 출근하면 회사 사람들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것 같다" 라며 부러워한다 했다. 웃으며 하는 그 얘기에는 호수 위를 유영하는 백조의 자부심과, 그 백조를 성공적으로 연기한 자의 고단함이 뒤섞여 있었다.
종종 듣곤 하는 부러움이 섞인 찬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건 우리 식구만 아는 일이었다. 엄마는 새벽이면 우리 중 가장 먼저 일어나 영어공부를 하고 나와 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놀이방에 데려다준 다음 출근했다. 그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젊은 엄마는 헌신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힐은 엄마의 전투화였다.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힐을 신고 걷는 게 그렇게 발이 아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게에서 신어보고 샀는데, 신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 밖으로 나오니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다니던 길이 온통 장애물 투성이었다. 자갈이 튀어나온 시멘트 포장길, 깨진 보도블록, 좌우 경사가 맞지 않는 비스듬한 인도 등등... 힐을 신는 건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문득 안 여사가 매일 오가던 출퇴근길에 가파른 언덕이 있던 게 떠올랐다,
‘뭐지? 일상이 극기훈련인가? ‘ 아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전투화는 예쁘기만 하면 안 되었다. 내 발이 견딜 수 있는 최대치의 시간을 벌어야 성공적인 하루 일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어중간한 로드샵에서 저렴한 맛에 살 수 있는 적당히 예쁜 힐은 신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양 발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발 사이즈 235도 다 같은 235가 아니며 심지어 오른발과 왼발도 볼 넓이가 서로 다르니까.
결국 엄마 신발을 빌려 신을 때도 이런 나름의 기준에 따라 신었을 때 발이 불편한 것들은 자연히 선택하지 않았다. 두 개 시즌을 통틀어 정리한다면서 단지 구두 다섯 켤레만 들고 나오게 된 이유다.
네이비 스웨이드 부티힐 (10. 튤 스커트 - 블랙 & 화이트 (brunch.co.kr))
블랙 튤 스커트에 매치했던 부티힐. 굽이 뱀피 패턴으로 싸여 있다.(물론 무늬만 뱀피다.) 스틸레토 힐과 고민하다가 지나치게 목에 두른 스카프와 포인트 컬러를 맞추기 위해 골랐다. 네이비-스웨이드 조합은 F/W 시즌의 실패 없는 스테디셀러이니 꽤 오래 신을 것 같다. 오픈 토에 발등까지 라인이 V자로 내려오도록 신경 써서 발목이 가늘고 길어 보인다.
버건디 페이턴트 메리제인 (11. 블랙 그래픽 티셔츠 (brunch.co.kr))
앞코가 둥글고 발등 위로 스트랩이 지나가서 안정감을 더해주는 구두를 메리제인이라고 하는데 디자인에 따라 스트랩의 위치는 달라지기도 한다. 5년 전쯤엔가 '분홍 신' 부를 때의 아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높은 굽의 메리제인이 유행이었는데 이제는 편안함이 강조된 패션이 대세다 보니 굽은 많이 낮아진 편이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한 녀석이라 포스팅에는 한 번 나왔는데 양말과 함께 코디하면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어서 앞으로도 종종 등장할 것 같다.
골드 샌들 힐 (4. 녹색 실크 블라우스 (brunch.co.kr))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즈음에 신었던 샌들이다. '올 골드'가 아니라 검은색의 컬러 블록이 적절히 들어가 옷을 매치하기에 부담이 없었다. 메탈릭 한 광택 때문에 신발만 튀어 보일 거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의외로 이런 골드나 실버 컬러가 다양한 옷과 두루 잘 어울린다. 본인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메탈릭 컬러의 신발 하나쯤 갖고 있으면 밋밋한 룩에 간단히 포인트 줄 수 있어서 추천한다. 안 여사와 같은 발 사이즈와 비슷한 피부톤을 가진 덕분에 나는 그저 빌려 신기만 하면 되었다.
블랙 레이스업 앵클부츠(7. 검정 프릴 블라우스 (brunch.co.kr))
지난가을과 겨울에 가장 편하게 자주 신었던 앵클부츠다. 하도 빌려신어서 그냥 나한테 중고로 양도할 생각은 없는지 안 여사를 설득하고 싶을 정도. 다만 힐 카테고리로 묶기엔 굽 높이가 다소 겸손한 편이다. 발목이 불편함 없이 딱 맞아야 전체적인 실루엣이 깔끔하고 예쁜데 그런 앵클부츠를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이 부츠는 소재 자체에 신축성이 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꼭 맞고도 편안했다. 팬츠, 스커트, 원피스와 두루 잘 어울려 뭐 신을지 고민될 때 저절로 손이 가게 되는 아이템.
블랙 롱부츠(9. 아이보리 블라우스 W/ 블랙 타이 (brunch.co.kr))
롱부츠를 살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종아리 둘레다. 그래서 수제화 전문점에 방문해 치수를 재고 주문 제작하는 게 가장 좋다. 그게 아니라면 꼭 신어보고 골라야 한다. 종아리가 붓는 오후에 신으면 조금 꼭 맞는 이 부츠는 디자인과 소재는 고급스러웠지만 개인적으로 다리 부분이 조금 조였다. 무릎을 덮는 싸이하이 길이의 부츠가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날이나 롱스커트와 매치할 신발이 필요했을 때 무난하게 잘 신기는 했다.
꽤 오랫동안 안 여사가 힐이 아닌 신발을 신는 걸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십 중반이 넘고 나니 아무래도 무릎에 무리가 간다며 점차 낮은 신발로 바꿔 신었다. 생일 선물로 운동화를 사줬는데 일 년을 아끼고 안 신더니 어느 날 항복 아닌 항복을 하는 걸 보며, '힐 진즉에 좀 포기하지' 싶다가도 '이 예쁜 걸 어떻게 안 신을까' 하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스니커즈와 운동화가 아무리 예쁘고 편해도 힐을 신었을 때 얻는 드라마틱한 라인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이제 나의 목표는 특별한 날에는 망설임 없이 힐을 신을 수 있는 중년을 맞이하는 것. 그러려면 평소에 열심히 걷고 런지에 스쾃까지 빼먹으면 안 되겠다 싶은데... 현실은 바닥에 매트 깔고 유튜브를 켜고 홈트레이닝 영상을 검색하다가 <악마는 정남이를 입는다>에 꽂혀서 첫 화부터 정주행하고 있는 그런 형국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