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옷장 속 보물 아이템_2020-2021 F/W_상의
영화 ‘어톤먼트’의 세실리아가 입었던 롱 드레스[1]는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영화 속 가장 멋진 의상'으로 기억된다. 주연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의 매력도 매력이겠지만 그녀의 드레스는 이제껏 한번도 보지못한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느낀 그 의상에는 내가 암울한 스토리의 무게를 이겨내고 이 영화를 다시 찾아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안 여사의 옷장에 무심하게 툭 걸려있던 이 실크 블라우스 한 장은 내게 영화 속 그 '녹색 드레스'를 떠올리게 했다. 물 흐르는 듯 유연한 실루엣은 카펫 위를 지나가던 주인공 세실리아의 긴 스커트를 자락을 눈앞에 그려주는 듯했다. 걸치는 순간 살갗에 차갑게 감기는 느낌은 빛깔만큼이나 청량했다. 그런데 홀린 듯 걸쳐 본 블라우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잠시 착각을 했던 것일까?
나중에 다시 찾아본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그 드레스와 안 여사의 실크 블라우스의 두 녹색은 사진으로만 비교해봐도 서로 비슷하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아주 다른 색이었다. 기억력이란 아무래도 저 좋을 대로 각색해버리기 선수인 모양이지만 사실 꽤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의 영화적 배경, 아니 착각이 없었다면 아무래도 이 공상은 달콤함은 덜했을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옷은 근사했다. 무엇보다 녹색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원색을 좋아하는 안 여사의 안목은 그 자유분방함과 거침없음 때문에 지난날 나를 꽤나 당황시킨 적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내 대학 입학식 때 선물해 준 마젠타색 벨티드 코트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색의 외투를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무렵부터 내 옷은 이제 내가 사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어쨌든 컬러를 고르는 과감한 안목 덕분에 안 여사의 옷장은 물감을 가득 짜 놓은 팔레트 같다. 작가라면 응당 그 각각의 색채가 품은 잠재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고, 안 여사는 자신만의 옷장을 꾸리고 다룰 줄 아는 훌륭한 작가이자 컬렉터로 살아왔다. 그 어깨너머로 보고 자란 풍월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Styling tip - 원색 블라우스를 하나쯤 갖고 있다면 하의는 기본 아이템 중 무엇을 매치해서 입더라도 근사한 룩이 완성된다. 나는 흰색을 워낙 좋아해서 하의도 흰색 계통이 많다. 흰색 정장 바지와 크림색 플레어스커트에 각각 입어보았다. 크림색 플레어스커트는 가을과 겨울에 내가 특히 즐겨 입는 아이템이다.
하의로 어떤 스타일의 옷을 매치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가지 아이템으로 최대 일주일 돌려 입기도 거뜬하다. 예를 들면,
월 - 블라우스+정장 바지: 포멀한 오피스룩
화 - 블라우스+롱 플레어 스커트: 여성스럽고 편안한 룩
수 - 블라우스+머뮤다 팬츠: 경쾌한 오피스룩
목 - 블라우스+블랙 스트레이트 진: 오피스 캐쥬얼룩
금 - 블라우스+패턴쇼츠 or 미니스커트: No 야근! 칼퇴근 룩
물론 몇 달 째 주 1회 출근하고 있는 나와 같은 재택 근무자에겐 이게 일주일이 아니라 한달짜리 계획이겠지만 말이다.
목걸이는 이제 하나만 하면 허전하다. 서로 다른 길이나 소재 등을 여러 개 레이어드 하는 게 쿨해 보이는 요즘이다. 3년 전인가, 안 여사가 이제 잘 안 한다고 해서 내가 '득템'했던 롱 목걸이는 크리스털이 알알이 촤르르 떨어지는 느낌이 실크 블라우스의 질감과 잘 어울렸다. 갖고 있으면 이렇게 다 나중에 쓸 데가 생겨서 내가 버리지를 못한다니까.
[1] 영화 "어톤먼트"의 의상을 총괄한 디자이너 재클린 듀런은 조 라이트 감독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던 이 우아한 드레스를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 100마 이상의 흰색 비단에 녹색 염료를 조금씩 더해가며 변화를 주는 실험을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렇게 완성한 이 녹색 드레스는 <타임>지에서 선정한 '영화 속 가장 멋진 의상'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 디자인 스토리 - [트라의 시네 패션 만담 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