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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유월 Nov 11. 2021

<결혼이야기>, ‘미안해’가 아닌 ‘고마워’

영화‘결혼이야기’를 보고




<1>시작

결혼이야기라는 제목은 처음에 나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의문문이나 역설이 없는제목. 단순 명사로 구성된 제목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지극히도 평범했다가, 영화가 ‘시작되며’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2>첫장면

왜 감독은 ‘이혼’을 다루며, 제목을 ‘결혼’이야기라고 지었을까? 이혼을 생각하게 된 시점부터 그들은 과거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이혼을하려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려면 처음 만난순간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의 테이프를 감아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찰리의 독백으로 ‘니콜은…’, 니콜의 독백으로 ‘찰리는…’, 서로의 장면을 이야기하며 시작하는 첫장면은 꽤나 인상깊다. 짧은 비디오테이프처럼 지나가는 장면들은 참 로맨틱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그 장면이 끝나고 나오는 다음장면은 우리에게 현실을 자각시킨다. 그들은 현재 이혼 중이라고. 그들은 현재 이혼중이고 영화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가 상기시키는 것은 그들의 과거이다. 그 과거들을 천천히 집어보며 영화가 흐르고, 이혼을 하며 영화가 끝난다. 결국 이혼도 결혼의 한 과정이라고 느끼게 된다. 당신과 내가 함께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기를, 지우고 싶은 과거가 되지않기를, 영화는 바라고있다.







<3>영화의 채도

영화는 이혼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자극적이지 않고, 매우 따뜻하다. 창백한 푸른빛으로 보이던 이혼이라는 존재, 뭔가 금지되어 있는 것 같은 존재는 지극히도 일상적이고, 인상적인 따뜻한 노란빛으로 돌아온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나는 이혼을 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사정을 모르지만,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제 더이상 서로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부부의 세계처럼 한 인물을 극단적인 악역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고, 알고보니 그저 서로가 잘 맞지 않아서일수도 있다. 이 영화는 미묘한 지점을 다루고 있다. 서로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어질 순간이 와서 헤어지는 순간도 있다. 유튜브에서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평을 보다가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이별의 순간에 ‘고마워’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미안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이 영화는 결말에 고마워를 말하고 싶어한다. 내가 그동안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해로 시작하는 것 같았던 영화는 당신과 함께한 시간에 대해 고마워라고 말하며 끝을 내는 것 같다. 고마워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이 영화는 따뜻하다. 영화초반에는 찰리와 니콜이 서로를 싫어하지 않고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개인적으로는).누구 한쪽이 크게 잘못했다거나 서로 질려서 이혼하는 것과는 좀 달라보인다. 처음에는 천생연분 같이 보였던, 같이 달리고 있는 것 같았던, 그들의 시간이 조금씩 틀어진다. 처음에 느껴졌던 이 감정은 니콜이 변호사를 채용하는 시점부터 변화한다. 변호사들은 법정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의 사소한 습관,행동, 그리고 상처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낸다. 서로의 상처와 숨기고 싶은 치부들이 완전한 타인(변호사)에 의해 분출되는 과정에서 서로의 사랑의 감정은 사그라들고,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필요이상으로 말이다. 이혼은 사실, 철저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처리되어야 하는 문제 아닐까? 사람사이의 대화로 해결하려 했던 이혼이 법정싸움이 되며, 오직 결과만이 중요한 게임으로 변질된다. 사람의 관계는 ‘과정’이 개입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결과만으로 그것을 따질 수 있겠는가. 단지 배우자가 그 말을 했다는 ‘결과’가 아닌, 그 당시에 그들 사이에 있던 감정과 상황, 즉 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그 미묘한 공기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법정절차에 의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혼소송은 사실 그들 사이의 대화로 해결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둘이 대화하다 싸우는 장면, 너무 과하게 감정을 분출해버린 찰리는 ‘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니콜에게 내뱉는다. 정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니콜은 충격을 먹었다기보다는 안타까운 표정이다. 그녀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던 둘이 이혼소송을 겪으며 서로에게 마음에도 없는 상처를 주게 되었다. 찰리의 분노는 그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주지만, 서로 아무말 없이 껴안는 장면을 통해 감정은 해소되고 분노는 사그라든다. 영화마지막에 이혼 후, 찰리와 니콜이 만나는 장면은 너무나도 담담하고 따뜻하다. 화면에서 점점 멀어지는 찰리의 차가 프레임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카메라는 그저 멈춰있다. 뜨거운 영화가 아니라 따뜻한 이 영화는, 이혼은 하나의 거대한 발단보다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한 순간 같다는 느낌을 대변해준다.






<4>개체가 아닌 공간을 봐야할까? 찰리에 대하여

찰리와 니콜, 니콜과 찰리.

내 시선에서 봤을 때는 니콜이 찰리에게 더 서운한 점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찰리는 바람을 한번 피웠고, 너무 과하게 일에만 몰입하는 경향, 그리고 니콜의 의견을 너무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점들을 봤을때, 니콜은 찰리에게 서운할 수밖에 없는 점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찰리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 평소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그럴리가 없는데, 왜일까?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 바람을 피우는 등장인물은 다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찰리는 여기서 바람을 피웠음에도 나에게 그런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다(물론 바람이라는 소재가 주요 소재는 아니었지만). 그의 잘못 하나보다는 ‘그’라는 사람이 보였다. ‘잘못’ 이라는 ‘나무’하나가 아니라, ‘그’ 라는 ‘숲’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만약 숲이 아닌 사과라는 예시를 든다면 조금 다르다. 사과의 한쪽이 썩었다면 그것은 썩은 사과이다. 하지만, 거대한 숲의 나무 중 하나가 시들었다면, 그것은 시든 숲일까? 또 그건 아니다. ‘사과’라는 개체와 ‘숲’이라는 공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가 다른 바람을 피운 주인공들을 썩은 사과라고 본 것은 그들을 한 개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곳이 썩었으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사람을 꼭 한개의 개체로만 볼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사람은 한 대상이지만,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겪은 세월의 축적이니까. 세월에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그 작고 작은 시간의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그 축적들이 바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심각한 범죄나, 과오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이다. 바람 또한 잘못이며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과오이지만, 나는 나무 하나 때문에 전체를 시든 숲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좋은 점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나에게 공간을 보는 눈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에 대해, 그들을 개체로 보는게 좋을까? 아니면 공간으로 보는 게 좋을까? 내가 당사자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텐데. 그럼에도 영화를 볼때는 다르게 생각되는 걸 보면, 이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것이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시선을 가졌던 나에게 공간을 보는 눈을 준 이 영화는 정말 신선했다. 비록 그게 감독이 전하려는 바가 아니더라도 그의 연출에서는 일반적인 이혼을 다루는 눈과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개체가 아닌 공간을 보고있다. 그게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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