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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유월 Jan 05. 2022

<굿바이칠드런>: 한페이지의 순간, 1그램의 중량

영화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을 보고

한페이지의 순간, 1그램의 중량

: 영화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을 보고


영화의 원제 ‘Au Revoir Les Enfants’은 굿바이 칠드런으로 바뀌면서 그 의미가 약간 퇴색되었다. Au revoir(오흐부아)와 Goodbye(굿바이)는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로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Au revoir는 ‘다시 만나자’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굿바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굿바이는 오히려 프랑스어의 Adiue(아듀)와 비슷해 보인다. 둘은 Au revoir와는 달리 다시는 만나지 못할, 영원한 헤어짐의 순간을 담은 듯한 단어처럼 보인다.줄리앙이 보네와 헤어지던 순간, 서로는 어떤 인사말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채, 그들은 Adiue가 아닌 Au revoir를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어린 날에 갇혀있는 시간의 미묘한 감정을 담은 단어를 굿바이로 해석한 점은 번역에 있어 약간 아쉬워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굿바이 칠드런이 아닌 오흐부아 칠드런으로 제목을 생각해주기를!


한국에서 따뜻한 영화에 비해 뜨거운 영화가 많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한국에는 이른바 신파, 감정이 과하게 분출되는 영화들이 많은 편이다. 뜨거운 감정은 순간적인 눈물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찌릿함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영화가 슬프다고 해서 관객도 슬픈 것은 아니다. 슬픈 상황에 담담하게 대처하는 영화들은 가끔은 관객들을 더 슬프게 만든다. 그 미묘한 찌릿함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소진되고 마는 일회성 눈물과는 다르다. 담담한 영화들은 밖으로 흐르는 눈물을 가슴 안쪽으로 끌어들여 내부에 툭 떨어뜨리고는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학교의 3명의 아이들은  독일군에게 잡혀가면서도 그렇게 울지않았을까. 그저 원래 예정된 일정처럼 묵묵히 끌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들에게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일처럼 여겨져야하는가. 아이들이 보이스카우트 놀이를 하는 도중, 줄리앙은 보네에게 ‘어떻게  많은 애들중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이지?’ 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학교에 있던 유대인 아이들은 다르다. 나치에 의해 언제든지 잡혀갈 수도 있던 그들에게 죽음은 상상할  없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꿰뚫는 장애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현재였다. 과연 누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할  있을까? 아직 천진난만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지 못하지만, 줄리앙은 조금 달랐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보네와  친해질  있었던  아닐까.


나치군에게 잡혀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정적으로 그려진다. 어찌보면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에 끌려가는  아니라는듯이.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문구는 이상하게도 가슴 한켠을 울린다. ‘보네, 네구스,듀프레는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다.  신부님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학교는 1944 10월에 다시 문을 열였다. 40년도  지났지만,죽는 날까지,  1 아침의 모든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그렇게 떠난 아이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학교는 다시 개교했다. 떠난 아이들의 시간은 멈췄지만 다른 아이들의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보네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들의 과거의 시간마저 잊고  것이다. 그들이 함께 살아있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같은 시간을 공유할  있었을텐데. 줄리앙은 보네를 잠깐 만났지만, 그는  시절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어쩌면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대사로 끝나는  영화는 우리가 살면서 잠깐 만난, 그렇지만 강렬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줄리앙에게는 보네가 그런 이이다.


떠난 보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전해줘야 할까.안타까움의 말, 사과의 말, 위로의 말?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하고있다. ‘그저 그들을 기억해주는 것’.  보네와 함께 보낸 시간을, 모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한 구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 같은 영화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들으며 이중구조가 되며 끝이 난다. 마치 이 일이 줄리앙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라는듯이. 이 영화의 이미지 자체도 삶의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무덤덤하다. 한페이지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꼭 1그램의 중량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슴 속에 추를 매단 듯, 계속 마음 한켠을 비행하는 순간이 있다. 비록 그것이 한페이지일지라도 그것은 항상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Au revoir, les enfants



보네, 네구스,듀프레는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다. 장 신부님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학교는 1944년 10월에 다시 문을 열였다.
40년도 더 지났지만,죽는 날까지, 난 그 1월 아침의 모든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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