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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유월 Jul 28. 2021

<빨간머리앤>당신의 핸드폰에는 몇개의 문자가 쌓여있나요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머리 앤(anne with an E)’를 보고

‘당신의 핸드폰에는 몇개의 문자가 쌓여있나요’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머리 앤(anne with an E)’를 보고

나는 ‘빨간머리앤’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다. 어릴적, 티비에서 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살짝 접한적은 있어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넷플릭스의 ‘빨간머리앤(Anne with an E)으로 그 이야기를 자세히 접했다. 그리고 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한다. 물론 시즌3에서의 갑작스러운 전개나, 원작과 너무 달라진 내용으로 원작팬들의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으나, 그래도 나는 이 드라마가 여전히 사랑스럽다. 앤이 가진, 그리고 시대가 가진 순수함이 나를 에이번리의 마을로 이끈다.


앤을 보면 솔직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는다.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그 솔직함이 순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과 천진난만함. 캐나다의 시골마을의 대지가 앤에게 그런 세계를 열어준다. 150년 전, 시골마을 이라는 텍스트는 당시시대의 순수함을 표현하기에 정말 적합하다. 물론, 그때에도 위선과 온갖 범죄들이 들끓었겠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와의 관계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

현대사회에는 정보가 넘쳐난다. 궁금한게 있어 웹서핑을 하면, 1분 안에 모든 정보가 나오고, 유튜브로 영어컨텐츠를 찾아보다 보면, 영어 사이트 광고창이 자꾸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역시 sns아닐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계속 관계망을 형성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낸다. 아무 생각없이 메세지를 보내고, 클릭 한번에 관계가 끊기는 그런 친구 말이다. [소셜네크워크]라는 영화 포스터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5억명의 친구를 얻고, 1명의 친구를 잃었다’.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이득이겠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와 다르다. 현대에 진정한 친구를 얻는 것은 더 어려운 일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오고, 그 문자 하나하나는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기호 정도로만 존재한다. 답장은 거의(항상) 형식적이고, 심지어 수백개의 문자들을 쌓아놓고 무시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요즘 세대 사이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습관이 된 것처럼, 핸드폰에 수백개의 문자들을 쌓아놓는 친구들을 본 게 한두번이 아니다.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옛날의 사람들은 텍스트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겼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그렇다. 나는 그게 그 당시의 순수함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앤과 다이애나의 일기, 앤과 길버트가 주고받는 편지, 앤의 부모님이 남기고 간 편지. 그 들 중 누구도 그것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글씨 하나하나를 곱씹어가며 적고, 소중히 보관하고, 읽고 또 읽는 그들의 태도가 참 좋았다. 기술의 발달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일을 편리하게 처리하게 되었다. 약속에 못갈것 같으면 문자를 보내면 그만이고, 급한업무는 바로 전화로 처리하면 된다. 옛날 로맨스 영화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같은 일은 없다. 급한 일로 약속에 나오지 못하게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이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일 같은 것 말이다. 편한게 최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 이런 순간들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말 하나하나가 중요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어서일까? 어린 나는 그런 시절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다보면 지나온 적 없는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생기기도 한다. 앤에서는 텍스트 하나하나가 소중한 관계들을 형성한다. 참 낭만적이다.





2:

빨간머리 앤을 보다보면, 그 시절의 다른 여류소설이 떠오른다. ‘제인 에어’, ‘작은 아씨들’ , ‘오만과 편견’같은. 여기서 앤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특이점은 바로 ‘사랑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 고아였던 앤은 항상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를 찾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소설에서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던 앤의 아픈과거를 드라마가 너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는 한다. 이런 의견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고아원에서의 아픈 장면이 앤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데에는 더 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앤은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상상력은 처음에는 현실도피적인 수단으로 나타났다. 고아원에서 학대받고, 왕따 당하던 앤은 현실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상을 이용해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된 후의 앤은 현실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상상은 더이상 현실도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고아원의 낡은 방에서 혼자 상상 속의 이야기를 읊조리던 앤은, 친구들 앞에서 상상의 이야기로 연극을 하며 논다. 그녀의 상상은 이제 현실 속으로 들어왔다. 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이라는 키워드는 그녀의 성장을 보여준다. 무거움을 가지던 그녀의 상상이 가족을 만나며 가벼움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성장한 그녀의 상상력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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