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네 빛이 일렁일때가 좋더라’
사람들이 흔히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스토리는 흔해’
하지만 스토리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표현력이라고 생각한다. ‘흔하다’는 단어는 예전에 있었던 것을 답습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즉, 이 스토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 스토리라인을 차용한 창작물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완벽한 창작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완벽하게 새롭고, 독특한 창작물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못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빛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달려있다.
1)엠버와 웨이드의 세계
엘리멘탈에서 가장 빛나는 점은 창조한 캐릭터가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지는지에 있다. 독창적인 이야기와 전개방식을 중심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캐릭터의 매력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영화가 있다. 엘리멘탈은 후자다. 개인적으로 디즈니 그리고 픽사가 제일 잘 다루는 것은 바로 매력적인 캐릭터의 창조라고 생각한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주로 다루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전체적인 플롯을 촘촘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쌓아간다. 캐릭터 자체보다는 이야기가 빛나는 영화다. 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개방식의 촘촘함이나 독창성은 좀 덜하지만, 세계관과 캐릭터를 구현하는 독창성과 창조성은 정말 빛이 난다. 인사이드 아웃이나 소울, 토이 스토리와 같은 애니메이션 속 디즈니와 픽사가 각 캐릭터의 속성을 디자인하는 방식은 아주 독창적이면서도 유쾌하다.
4원소를 그래픽적으로 잘 구현했을뿐만 아니라, 각 원소의 특징을 잘 따와 등장인물 개개인 세계를 잘 형성했다. 처음 오프닝 장면때, 공기비행선을 타고 다니는 산소 캐릭터를 표현한 방식은 정말 유쾌하다. 산소가 비행선을 탈때는 부풀었다가, 나가는 순간 확 줄어든다. 이렇게 다른 원소들이 이동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분류한 점도 재미있었다.
물로 이루어진 웨이드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웨이드가 스스로 불을 붙이는 장면이었다. 웨이드가 절대 향에 불을 붙이지 못할거라 믿는 엠버의 엄마 앞에서, 웨이드는 갑자기 엠버를 자신의 뒤에 세운다. 그리고 엠버의 불이 웨이드의 물을 통과하는 순간, 빛이 한곳으로 모이며 다시 불꽃을 창조해낸다. 이렇게 과학적인 원리를, 감성적인 측면으로 탈바꿈시키며 이야기의 전환을 시도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빛의 굴절을 보여주기 위한 애니메이터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안다. 결국 서로 다른 원소(사람)의 결합(사랑)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담은 것이다.
2)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지 않나 싶다.
엘리멘탈은 엄연히 이민자 2세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엠버는 파이어플레이스에서 넘어온 1세대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이다. ‘파이어플레이스계 엘리멘탈인’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방인처럼 차별을 받는 경험에서 엠버는 자신의 게토를 벗어난 세계를 밀어내게 되었다. 평생을 엘리멘탈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엠버는 파이어플레이스를 벗어나지 못한 이방인에 불구하다. 웨이드의 집을 첫 방문한 엠버는 그의 삼촌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우리 말을 엄청 잘하네!’. 엠버는 여전히 이 세계에 포함되지 못한 이방인처럼 비춰진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흔히 주류 백인으로 일컫어지는 사람 중, 이런 문제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한국계(혹은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미국인들에게 ‘영어를 참 잘하네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악의적인 경우는 주로 없다, 주로 칭찬의 의미로 그 말을 건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참 잘하네요!’ 라고 칭찬을 하는것처럼. 하지만 미국은 다인종 사회이다. 거기에서 이런 말을 건네는 것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이미 ‘백인이 아닌 인종은 미국인이 아니다.’ 라는 편견이 숨어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에피소드는 감독은 피터 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민자였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피터 손은 엄연히 미국인이지만, 마치 미국사회에 속하지 않은 듯한 차별을 겪으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다른 인종, 백인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고, 웨이드와 엠버의 정체성은 각각, 감독의 아내와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따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에 이민을 온 이민자 가족으로 표현되는 엠버와, 주류 백인 사회에 속해있는 웨이드의 정체성 또한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내에 위치해있는, 경비가 24시간 상주하는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웨이드네 가족은 아주 여유롭고, 자녀를 부담감없이 지원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류층 집안이다. 유명한 예술가 집안이며, 살아가는 문제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있는 그런 지식인 집단.
반면 엠버네 가족은 살아가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부족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엠버의 부모님은 평생을 바쳐야했다. 예술이나 문화는 관심없을 뿐더러, 파이어 플레이스라는 자기 정체성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것조차 꺼려한다. 그저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할뿐 다른 원소(혹은인종)과 섞이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서로 헤어지고 나서의 상황으로 비교할 수 있다. 엠버에게 차인 후, 웨이드가 하려 했던 것은 세계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반면 엠버는 가족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도 못한채, ‘파이어 플레이스’ 내에서 그저 제자리를 돌 뿐이다. 이러한 둘의 상황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섞일 수 있다.’라고 말하는 이 애니메이션이 너무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감독은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족과 사랑, 그리고 정체성)를 은유적인 세계관을 통해 풀어냈다. 가족, 또 가족을 강조하는 디즈니와 픽사의 메시지는 어떤 이에게는 고루하고 지겨울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런 이야기를 (아름답게 펼쳐내는) 영화가 부족하기에 우리 시대에 이런 영화는 꼭 필요하다 생각한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가 난무하는 시대에, 이러한 애니메이션이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따뜻함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