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나를 만든 장소들

유럽 플레이리스트

by 하이유월

<서문>나를 만든 장소들


어릴적의 기억은 평생을 간다고 한다.


모두에게는 어려서부터 쌓아온 마음의 서랍이 있다. 각자의 마음의 서랍에는 자신을 구성하는 취향과 요소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나의 서랍 속에는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쌓아오던 것이 있었다. 바로 유럽에 관한 것들.

종로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상 지하의 작은 중고서점에 들리고는 했다. 평소 일러스트북과 만화를 좋아하던 나에게 아버지는 항상 귀여운 책들을 사오고는 했는데, 어느 날 나는 이 책을 만났다. 권윤주 작가의 ‘스노우캣 인 파리’. 9살의 어느날 이 책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작가가 파리에 지내면서 겪은 일들을 만화로 그려놓은 일러스트북이었지만, 귀엽고 힘을 뺀 듯 세련된 그림체와 시니컬한 문체가 독특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 책에 푹 빠져버렸고, 프랑스 파리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부모님과 여러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며 여행 일러스트북을 사들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고르는 나의 기준은 꽤 까다로운 것이었다.

‘이거는 너무 평범해’

‘얘는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

‘저거는 글이 너무 많아’

그렇게 모인 나의 여행책 모음집은 지금도 우리 집 서재의 한켠에 소중히 모셔져있다.


파리에 대한 첫 책을 시작으로, 나는 유럽에 관한 버킷리스트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수첩에 버킷리스트를 쓴 적은 없지만, 너무나 많이 읽은 탓인지 마치 자동 응답기처럼 장소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유럽에 진심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파리의 어떤 장소를 보면, 나는 후다닥 서재로 달려가 그 장소를 본 페이지를 정확히 찾아내고는 했다. 마치 기억 속에 그대로 그 장소가 저장된 것처럼.


그런 태도가 나의 습관이 된 탓인지, 나는 가고 싶은 장소를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학생 시절, 역사와 사회 과목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시간에는 항상 장소가 나온다. 그것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닌 장소들. 나는 역사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어쩌면 책 속에 나오는 과거의 유적과 장소들을 보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낀 듯하다. 그래서 역사 시간이 좋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수업시간에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오면 알림장 같은 노트에 적어놓고는 나중에 꼭 가봐야지 생각하고는 했다.


나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편하게 쉬면서 즐기기 위한 휴양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관광도 아닌, 내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영화나 책 속에서 보던 평면의 장면들이 내 눈 앞에서 입체가 되는 순간, 내게 찾아온 것은 단순히 여행이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특히 그것이 유럽이었을 때, 상공에서 12시간을 버텨야만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먼 곳이었기에 더 특별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직접 볼 수 없던 것 같은 장소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에는 마치 지금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단지 꿈으로만 남을 것 같던 장소들이 눈 앞에 나타날 때, 내가 그 장소를 찾은 게 아니라 그 장소가 나를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여행이 좋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일상 속에서 그걸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은 행운 중 하나이다. 나는 나와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장소와 나의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통해 나의 행복을 찾았고, 또 찾아나갈 예정이다. 이 책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향한 작은 연결고리를 되기를 바라며. 나의 작은 장소들이 독자분들의 일기장에, 핸드폰 메모장에, 혹은 기억 속에라도 남아 행운을 선사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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