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2020, 미술학원에서
Since: 2020, 미술학원에서
To: 2023, 런던 동쪽의 레드 하우스에게
레드 하우스와의 첫만남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미대 입시생일 때였다. 미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기만 잘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론에도 빠삭한 똑똑이가 되어야만 했다.
우리 화실에서는 2주에 한번씩 진행하는 디자인사 수업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레드 하우스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노트를 펼치고 필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날의 주제는 미술 공예운동과 윌리엄 모리스였다.
사실 나는 미술공예운동이니, 윌리엄 모리스니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입시를 위한 단계의 한 칸을 채워주기 위한 블럭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사진을 보는 순간 그렇게 나는 또 레드 하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상했다. 정말 특별한 게 없었다. 레드 하우스의 사진을 보고 멋지다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다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곳은 말 그대로 레드하우스 - 붉은 벽돌의 집 -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보여준 그 사진은 정말 영국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낡아버린 붉은 벽돌이 켠켠히 쌓여있는, 화려함보다는 고딕한 느낌의 왠지 모를 음침한 영국 감성이 돋보였다. 작게 난 창으로는 채광은 물론, 통풍도 잘 안 될것 같은 그런 답답한 공간.
나는 그 곳에서 현대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보다도, 이런 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그 장소가 아직도 나와 같은 세상 어딘가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국의 많은 역사적인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이름 모를 기업들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영국 런던의 한편에 이런 장소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역사 책에서 보는 모든 장소들은 마치 이미 사라져버린 신기루처럼 나를 착각시킨다. 역사책에서 보는 장소는 현재 진행형이 아닌, 이미 과거형으로 끝마쳐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실제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때의 신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목도리가 필요한 4월의 런던에서, 레드 하우스를 찾았다. 레드 하우스는 접근성이 좋은 곳은 아니다. 런던의 동남쪽에,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보다도 더 동쪽에 있으니 찾기 쉬운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나에게 가고 싶다면 못 갈곳은 없었다. 저기 먼 시골도 혼자 척척 가버리는 나에게 레드 하우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착해 제일 놀란 것은 바로 레드 하우스의 규모였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은 꽤나 넓어보였는데 생각보다도 너무 작았다. 조금 큰 가정집을 2개 정도를 합쳐놓은 크기였다. 동네 가운데에 아무렇지 않게 자리잡고 있는 레드 하우스는 문화유산이 아닌 그냥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다. 마치 아직도 그곳에 누가 살고 있다는 듯이.
도착한 대문 앞에는 블루 플라크가 붙어있었다. 만약 런던을 방문하게 된다면 건물 곳곳에 있는 파란색 동그라미를 유심히 보기를 바란다. ‘블루 플라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살았던 집에 붙여놓는 공식적인 표식을 의미한다.
‘william morris, poet and artist’
집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윌리엄 모리스 특유의 패턴으로 꾸며진 벽과 천장, 섬세한 그림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묘한 분위기.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사실 이 레드 하우스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일종의 가십거리인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 제인 버든, 그리고 가브리엘 로세티의 삼각관계 이야기.
윌리엄 모리스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뮤즈였던 제인 버든과 결혼을 한다. 레드 하우스도 제인과 함께할 신혼집으로 의뢰를 해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결혼 후 다른 남자와 밀회를 즐기게 되는데, 그 사람이 윌리엄 모리스의 절친인 화가 가브리엘 로세티였다.
역사 속 예술가들의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 흔하지만 제일 신기했던 점은 윌리엄 모리스가 이걸 다 알면서도 평생을 모른체하고 제인과 살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출장으로 해외에 나가 몇달을 살아야할 기간이 있을때마다, 집에 로세티를 불러 제인과 가족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떼어놓아도 모자랄 상황에, 오히려 둘을 더 이어주는 이 얼마나 독특한 행동인지. 윌리엄 모리스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구나 생각한다.
레드 하우스에 도착하기 전에 읽는 이 흥미로운 가십거리 때문에 우리는 계속 이 생각을 하며 레드 하우스를 구경했다. 도슨트 분이 로세티와 제인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구경했던 레드 하우스가 좋았냐 하면, 내 대답은 무조건 ‘그렇다’이다. 역시 스토리가 있는 공간은 잊혀지지 않는다. 대문과, 나무 계단, 하얀색의 예쁜 캐비넷과, 절제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볼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한바퀴를 돌아본 레드 하우스는 아름다움과 비밀을 간직한 공간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