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
<길버트 그레이프>에 이어 1993년 작 <디스 보이스 라이프>를 보았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두 영화 모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다. 디카프리오는 아마도 성년이 되기 전부터 그 연기력을 업계에서 인정받았을 테고, 일찍부터 명작에 이름을 올렸다. 좋은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놓쳤던 명작을 하나씩 보는 과정에서 디카프리오를 연달아 만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에 실패하거나 지칠 때면, 옛날 영화를 찾게 된다. 옛날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안전하다. 작품성도 재미도 이미 검증되어 있으니까. 추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직 죽을 날이 가깝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래서 생명 연장의 꿈 운운할 단계는 아니지만)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살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느낌이랄까. 운 좋게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나면, 의도치 않게 어떤 의미까지도 찾을 수 있는데, 물론 이건 덤이다. 옛날 영화라서 이미 본 영화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나지 않으니까. 다만 익숙하고 오래된 것을 찾는 심리가 (니체 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생명력의 쇠퇴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는 작가 토비아스 울프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토비아스 울프의 소설 <이 소년의 삶>과 <올드 스쿨>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 이 두 책을 출판한 문학동네에서는 작가의 이름을 '토바이어스 울프'라고 표기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직 두 책 모두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체로 평이 좋다. 어쩌면 <이 소년의 삶>은 읽게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한 소년이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뚫고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토비의 환경을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정도로 척박하게 그리지는 않고, 작가가 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아버지 없이, 일정한 직업도 없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토비의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토비의 어머니는 유쾌하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아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만 돼도 토비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다. 여기에 더해 토비에게는 책을 읽고 느낄 줄 아는 능력(이건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과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다. 영화에서 토비의 글재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없지만, 토비는 소설가 잭 런던의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자신을 '잭'으로 불러달라고 하고, 양아버지 드와이트(로버트 드니로)는 토비에게 침대에서 책이나 읽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토비는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로부터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으며, 책도 상당히 많이 읽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작가가 될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자질이 배운다고 길러질 수 있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런 능력과 재주를 타고난 토비의 삶은 결코 나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한 소년의 비참한 삶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본 탓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드와이트(로버트 드니로)에게 눈길이 더 같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많지 않은 40대 중년 남성. 생활에 쪼들리고 생존이 유일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약자. 내면의 열등감을 허세로 감추고, 들통날까 봐 욕설과 폭력으로 방어하는 나약한 인간. 무언가 잘해보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지만 타고난 능력도 없고 습득한 기술도 변변찮은 사람.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본 아내는 당시 영화를 볼 때는 드와이트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드와이트가 땅콩버터를 제대로 긁어먹지 않고 통을 버렸다고 식탁에서 죽도록 패는 장면은 정말이지 살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방면의 연기는 로버트 드니로를 능가할 배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찌나 얄미운지!), 지금은 오히려 드와이트가 안쓰럽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토비에게는 창창한 앞길이 있지만, 드와이트는 이제 인생을 바꿀 만한 시간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토비가 드와이트의 집을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길버트 그레이프도, 토비도 모두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떠나면서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떠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떠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그 둘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