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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Apr 06. 2019

과장님과의 만남

지나간 시간을 쓸쓸하게 돌아보다

2019년 4월 4일의 기록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은행이었다. 전공이 국문학이었고,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던터라, 은행에서 일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은행은 좋은 직장이고,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목표로 하는 곳인 건 맞지만, 무용한 공부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내게 은행은 완전히 관심 영역 밖이었고,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고, 당장 빵과 직결되기 어려운 문학과 철학에 인생을 걸 결기가 부족했던 나는,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직장을 택했고, 그렇게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업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못했던) 은행원이 되었다.


6주 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경기도 부천의 한 지점으로 배치되었다. 신입행원이 으레 그러하듯 당연히 모출납(지점 내 모든 직원의 돈을 관리하는 업무다. 쉽게 말하면 하루 종일 창구에서 돈을 세는 업무를 한다. 여균동 감독의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보면 모출납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짧고 강렬한 장면이 나온다.) 업무를 맡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신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행원에게 여신 업무를 잘 맡기지 않는 관행이 있었는데(이는 명백한 성차별이고, 지금은 이런 관행이 바뀌었을거라고 기대한다.), 그 때문에 경험이 없는 신입에게 여신업무를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사람들에게 (내 돈이 아닌 은행 돈으로) 돈을 빌려 주는 일로 은행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은 항상 낯설고 두렵지만, 누군가를 믿고 돈을 빌려주는 일은 손이 떨리는 일이었다. 잘못했다가는 월급은 구경도 못하고, 내 돈으로 메워야 하는 일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 업무가 학자금 대출이었는데(2월에 입사했으니 한창 학자금 대출 시즌이었다.), 200만 원 조금 넘는 대출 기표를 하면서도 어찌나 긴장이 되었는지(몇 달 후에는 10억이 넘는 돈도 아무 생각없이 대출을 하고 있었다.) 간신히 한 건을 끝내면 와이셔츠는 축축하게 젖었고, 바깥으로 뛰어나가 담배 한 대 피우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대출 자체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몰려드는 손님(이 중에는 당연히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항의하는 손님이 반드시 있다.), 은행 특유의 낯선 용어들, 보수적인 조직 문화, 마음은 따뜻할지언정 신입에게 그닥 살갑지 않은 선배들...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런 숨 막히는 상황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줄 수 있었던 건, 그러니까 잘 적응해서 최소 몇 년은 마음 편히 월급 받아 살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과장님 덕이었다. 내 뒤에 앉아 방귀를 뿡뿡 뀌어대며(어쩜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방귀를 뀌셨는지!) 서류에 결재 도장을 쾅쾅 찍어대던, 자그마한 체구, 희끗한 머리, 두꺼운 안경, 자상한 목소리의 과장님이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과장님은 10년 이상 선배였음에도, 아무런 격의없이 대해 주셨고, 우리는 이내 급격히 친해졌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담배를 피우고, 상사들 뒷담화도 신나게 하고, 손님이 뜸할 때는 근처 포장마차에 오뎅을 먹으러 나가기도 하고... 소소하게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함께 하면서 참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과장님과 1년을 지냈고, 과장님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가시고, 나는 1년을 더 다닌 뒤 직장을 그만 두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과장님은 나와 만나기 전에 했던 대출에 관한 법적 문제에 얽혀서 직장을 잃게 되었다. 과장님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이기에 많이 안타까웠고, 많이 슬펐다. 변호사가 된 지금 과장님 사건을 돌이켜 보면,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나는 무죄를 확신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사법시험 3차 면접에서 왜 법조인이 되려고 하는가라는 면접관님의 질문에 나는 과장님을 떠올리며 자신의 몫만큼 가질 수 있는 사회,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 노력한 것 이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사회, 자신의 행위 이상으로는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노력과 보상이 일치하고, 행위와 책임이 일치하는 것이 정의이고, 공정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직장을 잃고 그래서 가정까지 위태로웠던 과장님은 많이 힘들었지만,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몇 년의 시간을 이겨내 왔다. 2년 전쯤 과장님을 몇 년만에 만났고, 이제 또 대략 2년 만에 과장님을 다시 만났다.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 (분명히 어딘가에 흔적은 남았겠지만) 어쨌든 흘러가고, 다행히 과장님은 안정을 찾으신 것 같았다(모르겠다,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우실지도). 우리 둘 사이에 10년도 넘는 시간의 공백이 있지만, 그 공백을 훌쩍 뛰어 넘어 우리는 10년도 더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부천에서 담배피고, 술 마시고, 오뎅 먹고, 대출서류에 도장 쾅쾅 찍어대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런데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과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건 어렵다. 상처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애써 모른 척 하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건 힘들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모두 생략하고, 옛날 즐거웠던 시간을 간신히 붙잡아 봤자 어쩐지 씁쓸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나긴 시간을 쓸쓸하게 돌아 본 것은. 나도 아마도 과장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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