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
2019년 4월 3일의 기록.
연세가 많으신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부모님과 10분 이상 집중해서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지거나, 속마음을 숨기게 되는 것 같다. 고집은 세지고, 이해심은 옅어지고, 작은 일에도 서운하고, 서러운 것이 많아진다. 귀가 안 좋으니 목소리가 커지고, 눈이 안 좋으니 인상을 쓰게 된다. 젊음에 이유없이 질투가 나고, 나이듦에 괜스레 눈물이 난다. 나도 늙어가고, 나도 똑같아 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가수는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의 길"이라고 노래했지만, 나이들면서 이제 이런 윤리적인 차원의 고민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연세가 꽤 많으신 어르신과 법률상담을 했다. 그냥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은데, 법률상담이라니. 상담을 하기 전에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꽤 긴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실 수 있을까.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단어를 써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2시간 가까운 시간 상담을 했는데, 법적인 문제와 관련된 얘기는 약 10분 정도만 했고, 나머지는 어르신의 얘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어르신이 원하는 것도 자기의 얘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이었고.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의 특징은 현재를 이야기하는데 항상 과거로부터 거슬러 올라온다는 것이다. 대체로 6·25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박정희 시대에 학생들을 인솔해서 군부대를 견학하게 되었는데 큰 버스회사의 버스를 20대 빌려서 다녀 온 얘기(이 분에게는 이것이 자랑거리였나보다), 전두환 시대에 사업을 크게 해서 청계천을 주름 잡았던 얘기 등등으로 이어져 현재로 돌아온다. 과거의 직업에 따라 디테일은 다소 다르지만, 공통점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붙잡고 또 붙잡고 싶었던,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랬다. 마주 앉은 어르신이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들으면서 나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떠올렸다. 이 정도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뻔한 클리셰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혹은 과거를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논리가 별거인가. 이유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 앞에 앉은 어르신은 하느님을 보았고, 악마를 보았고, 저승사자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모든 이야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법률상담이 아니라, 나이듦에 대해, 지금의 시간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