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으로 돌아가다
2019년 4월 12일 금요일의 기록
작년부터 서울시공익변호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법인에 소속변호사로 매여 있던 나머지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올해 개업하면서 처음으로 마을변호사로 무료법률상담을 진행했다.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고, 처음 가는 곳이기도 해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일찍 출발했다. 가는 길에 담당공무원께서 전화로 4분이 상담예약을 했고, 1인당 30분씩 상담을 해주시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법률상담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두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오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두 시간을 꽉 채워 상담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 신이 났다.
도착해서 동장님과 차를 한잔 마셨고, 그곳에서 예전에 한 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할 때 같은 과에 근무하셨던 주임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많이 늙기는 하셨지만(나도 많이 늙었겠지), 당연히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주임님은 날 못 알아보는 눈치셨다), 꽤 반가웠고, 신기했다. 주임님은 정말 잘 살아야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이더냐.
1인당 30분의 상담 시간은, 글쎄 사건의 종류나 난이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시간이다. 특히 상담을 하러 오는 분들이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해 꽤 고민하고 사건의 내용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온다면, 꽤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사전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인지, 이 날 오신 분들은 모두 본인의 사건을 잘 정리해 왔고, 나름대로 자료도 충분히 준비해 오셨다. 그 덕에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실질적인 도움을 드린 것 같다,라고 끝나고 나서 자평을 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변호사라고해서 모든 법률문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전문변호사를 표방하는 변호사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나름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또 전문변호사를 표방한다고해서 다른 분야의 법률 문제를 모르는 것이 용인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의료소송을 주로 하는 변호사라고해서 임대차나 이혼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그것도 자랑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에게 중요한 것은 기본과 리서치 능력이다. 어떠한 문제이든간에 미리 문제를 듣고 하루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리서치를 통해 해결의 틀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문제(상담주제)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오늘처럼 곧바로 대면상담을 해야 하는 경우다. 위에서 변명처럼 얘기했듯이, 변호사라고해서 모든 법률문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질문자와 마주 앉는 순간, 시험지를 기다리는 학생의 심정이 된다. 이날도 절실히 느꼈지만,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바로 기본이다.
기본은 법의 뼈대에 대한 깊은 공부에서 나온다. 내 생각에 법의 뼈대는 (감히 말하건대) 민법과 형법이고, 여기서 말하는 '깊은 공부'는 혼연일체를 이룰 정도의 완벽한 암기를 의미한다. 사법시험 비판론자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들을 암기에만 능한 자들이라고 비아냥대곤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분들은 공부를 제대로 안 해 보신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 공부는 암기다. 암기는 이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암기도 되지 않는다. 암기를 했다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단 시험공부만이 아니다. 대학교 시절, 동양철학 강독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암기하도록 시켰는데(논어와 맹자를 다 외우지는 못했고, 대학과 중용은 완전히 암기했다), 공부의 요체를 몸으로 깨닫게 해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암기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제아무리 복잡한 법률문제를 만나더라도, 해체가 가능하고, 해체의 결과물은 법의 가장한 기본인 민법과 형법에 대한 지식으로 분석이 가능해진다. 상담을 하러 오신 분들이 예상하지 못한 이런저런 문제들을 던져 주셨지만, 기본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고민하고, 어느 정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답을 해 드린 것 같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을변호사 얘기로 시작해서 공부 얘기로 끝이 나버렸구나. 자, 다시 마을변호사 얘기로 돌아가면, 꽤 괜찮은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변호사가 홍보나 수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변호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 타인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려는 마음이 클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법을 알리고 싶은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참여해야 제도가 활성화된다. 그러니 고민되는 법률 문제가 있다면, 한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변호사를 찾아가도 좋을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금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