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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n 11. 2019

예술은 언제 슬퍼하는가

박종호, 민음사, 2016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X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폐쇄적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의 본질을 규정할 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며, 그렇게 규정한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에 '非-예술' 혹은 '가짜-예술'이라는 딱지를 붙여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다. 이와 같은 폭력성과 폐쇄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어의 자리에 있는 'X'를 술어에 위치시켜야 한다. 즉,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이러저러한 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박종호의 『예술은 언제 슬퍼하는가』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예술관은 다소 경직되어 있고 폐쇄적이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밝은 곳에서 안주하는 사람들만 위로하고 그들의 가려운 등이나 긁어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잘난 사람들의 남아도는 시간을 때워 주거나, 고급스러운 취미를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남과 다른 고상함을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신의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14쪽)


예술은 약자에 대한 위로는 될 수 있을지언정, 강자에 대한 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이 땅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강자들의 정신을 깨우는 것이다. 세상이 앓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만족하며 사는 시민들에게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주어서, 그들의 의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15쪽)


고개를 돌려 타인을 보라. 가난한 자, 불쌍한 자,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이제 벙어리를 위하여 입을 열고, 들리지 않는 자를 위하여 대신 들어 보자. 그것이 진짜 예술의 태도다. 망설이지 말고 목청을 높이라. 예술의 의무는 인식이며, 예술의 결과는 정의다.(272쪽)


저자는 '소수자'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억압받고 차별받고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소수자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예술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장애인/추방자/유대인/창녀/유색인/자살자/유기아와 사생아/성 소수자를 사회적 '소수자'로 보고, 이들에 관한 얘기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문화적 교양 체험은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데, 특히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와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귀여운 여인』을 겹쳐 있는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대목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인식은 철학이 담당하고, 정의는 정치를 통해서 실현될 것이며, 진리(인식)와 공정한 분배(정의)의 토대 위에서 예술은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적 쾌락을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상적인 사회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예술관은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앞으로도 소수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예술 작품은 나올 것이며, 나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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