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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Apr 02. 2019

끝, 그리고 출발 (6)

피카딜리 서커스, 마침내 이곳에 오다

[피카딜리 서커스 큐피드 상]
[피카딜리 서커스 대형 광고판]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 우리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어디를 갈 것인가'였다. 한 달은 짧지 않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해가 짧은 겨울이라 하루 중 밖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그러나 실제로 밤에도 많이 돌아 다녔다), 이것저것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많다는 점, 여러 국가를 이동하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따라서 시간 낭비없이 행선지를 잘 짜는 게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첫 유럽여행이니만큼, 행선지 선정의 우선적 기준은 '로망 실현'이었다. 따라서 1순위 여행지는 독일이었다. 문학과 철학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인 나에게, 유럽은 문학과 철학을 통해 다가왔고, 그 때의 문학과 철학이란 다름 아닌 '독일문학'과 '독일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나라 독일을 1순위로 놓고, (실제 가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낭만의 아이콘으로 이상화되는 파리, (아직 나는 그 진가를 잘 모르겠지만) 유럽 여행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고등학교 때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스페인을 대충 한 달간의 유럽 여행 행선지로 결정했다.


그런데 나와 동행할 인선은 다른 생각이었나보다. 그녀는 놀랍게도 런던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영국이라니! 영국은 글쎄 뭐랄까...나에게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색무취의 이미지였다. (지금이야 100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이것이 영국이야"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고스와 에토스는 있지만, 파토스는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녀의 환상은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당연히 나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환상의 기원은 이랬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나오는 BBC 드라마 <셜록>의 오프닝에서 대형전광판이 나오는데, 그녀는 그 장면을 본 이후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로망'을 키워 왔다는 것이다. 행선지 선정의 기준이 '로망 실현'이었으니, 그 전광판이 있는 곳은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독일은 어쩐지 추울 것 같았고,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생각해 내면서 독일을 제외했다(아마 그래야 다음에 또 유럽 여행을 간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던 것 같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은 아직 안 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뒤늦게 런던이 우리의 여행지 목록에 합류하게 된 이유인 피카딜리 서커스.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버스는 정신없이 오고 가고,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대형 전광판 불빛이 번쩍번쩍 거리는 이곳 피카딜리 서커스. 그러나 <셜록>에서 보았던 그 전광판을 보았고(그게 뭐라고!), 이렇게 몇 년간 마음 속에서 키워 왔던 작은 로망 하나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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