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쉬 감독
#작가가 된다는 것/글을 쓴다는 것
대학교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때의 일입니다. 꽤 특이한 동아리라서 동아리방도 여느 동아리처럼 학생회관에 있는 게 아니라 학교 내 산 중턱에 있었고, 그 형태도 가건물내지는 움막에 가까웠습니다. 신규회원도 저를 포함해서 딱 두 명이었습니다. 신입생 환영회도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하는 게 아니라 동아리방 앞 마당에 드럼통을 놓고 거기에 불을 피워서 시장에서 직접 사온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은 불을 피울수 없겠죠, 아마.). 말 그대로 직화구이 삼겹살인지라 어찌나 맛이었는지요! 3월이라 아직은 해가 짧아서 금방 저녁이 되고 어두워져서 삼겹살이 제대로 익었는지 어땠는지 잘 확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익혀서 먹겠다는 생각보다는 타기 전에 먹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름 명맥을 이어오고 있던 동아리였는지 대학을 졸업한 30대 선배도 몇 분이 퇴근을 하고 왔습니다. 아직은 낭만이 있었던 시절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선배가 여전히 가슴에 꿈을 품고 사는 낭만적인 사람이었을까요. 잘 익지도 않은 삼겹살 먹느라 정신없는 저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의 제 꿈은 덜 익은 직화구이 삼겹살을 많이 먹는 것이었습니다만...ㅎㅎ) 세상에, 꿈이라뇨.
하지만 낭만적인 시절이었나 봅니다. 저는 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름대로 가슴에 품은 꿈이었지요.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이청준 같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교수가 되는 것이고, 셋째는 기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꿈을 세 개나 말했다는 게 이미 어떤 복선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복선같은 것이죠 ㅎㅎ)
그 선배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그 셋 중에 소설가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나중에 살아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더 얘기를 나눠 보니 그 선배의 의도는 정확히 말하면 그냥 소설가가 아니라 '이청준 같은 소설가' 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독문과 출신인 그 선배에게도 이청준은 넘을 수없는 거대한 우상이었을터이니 제 꿈이 터무니없이 커보였던 것이었겠죠. 현실인식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지라 '이청준 같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꽤 일찍 접었고, 어찌어찌하다가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소설가/교수/기자와의 공통점인 글을 쓰는 일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변호사는 타인의 일상을 간접체험하고 그 내용을 법률용어로 번역합니다. 잡다한 일상을 정제된 서면으로 정리합니다. 글의 목적은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하고, 판사를 설득시키는 것으로 한정되기는 합니다만, 저는 어쨌든 거의 매일 타인의 삶의 어느 특정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변호사이지 작가가 아닙니다. 설사 제가 변호사로 살면서 아주 운좋게 책을 한두권 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작가라는 자의식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브런치팀에서 저에게 브런치라는 공간에 글을 쓰는 것을 허락해 주면서 '작가'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고 하더라도, 저에게 '작가'라는 자의식은 당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저에게 '작가'는 이청준, 도스토예프스키, 프란츠 카프카,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요? 이런 생각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기는 합니다만) 타당한 것일까요? 문학과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그런데 문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요?) 교수님들은 은연중에 문학이 대단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문학과 교수들은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인데 자신들이 연구하는 대상이 적어도 자신들보다는 더 대단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하는 대상이니까 뭔가 '대단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작가가 된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을 보면서 저는 이 묵직한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패터슨>-시가 되는 일상/일상이 되는 시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의 버스 운전기사입니다. 그의 일상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일 똑같습니다. 아침에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합니다. 버스 운전을 하다가 점심이 되면 부인이 싸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습니다. 퇴근을 하면 집 앞 기울어진 우체함을 바로 잡고(이 우체함은 매일 바로 잡는데도 매일 기울어집니다. 매일 기울어지는 이유가 재미납니다. 짐 자무쉬의 소소한 유머라니!), 집에 들어와 부인과 저녁을 먹습니다. 저녁을 먹고나서는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서 늘 가는 동네의 작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십니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잡니다.
그런데 패터슨의 일상은 특별합니다. 그는 시를 쓰기 때문입니다. 아침 식탁에서 성냥갑을 들여다 보다가 시를 씁니다. 창으로 들어 오는 아침 햇살이 사랑하는 부인을 비출 때 시를 생각합니다. 버스를 운전하면서 시상을 떠올립니다. 저녁 식사 후 산책길에 들르는 동네 작은 바에서 마시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다가 시를 씁니다. 점심 때 혼자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시를 씁니다. 자신이 쓰는 시로 인하여, 그의 일상은 시가 되고 그의 시는 일상이 됩니다. 시와 일상이, 글쓰기와 일상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마저도 시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냥갑, 햇살, 맥주잔 등 흔한 일상이 시를 통해 특별한 순간, 특별한 사물이 되었다가 결국 시를 통해 일상이 됩니다. 시로 인하여 그의 일상은, 그의 삶은 조금 더 특별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감독이 주인공의 이름을 '패터슨'이라고 한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뉴저지주의 한 도시인 '패터슨'으로 설정한 의도도 분명해 보입니다. 패터슨은 미국의 유명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활동했던 곳입니다. '패터슨'은 이 시인의 5부작 시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주인공패터슨의 '영웅'이기도 합니다. 이 시인의 사진이 패터슨의 지하 작업실에 걸려 있기도 합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어떤 경향의 시를 썼는지는 영화에서 패터슨이 부인에게 읽어준 시 <다름 아니라>를 읽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시가 별건가요. 공자님은 ‘생각함에 있어 사악함이 없는 것’이 시라고 하셨지요. 이리저리 숨기고 눈치 보는 삶 속에서 한 번쯤 솔직하게 글로 내 착한 마음을 고백해 보는 것,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도 조금 열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제일 좋아하는 본인의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시>라는 제목의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면서 본인 나름의 '시에 대한 정의'가 담겨 있는 시라서 좋아한다고 한 바 있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 <시>
짐 자무쉬가 영화 <패터슨>을 통해 글쓰기, 시쓰기, 작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패터슨 시에서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했습니다(처방전에 시를 적기도 했다고 합니다ㅎㅎ). 나태주 시인은 평생 교사로 일했습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기사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패터슨은 시를 쓰는 일본인을 만납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해 패터슨 시를 찾아 온 일본인입니다. 그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빈 노트 한 권을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뭐든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의 무게에 짓눌려 답답한 가슴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꼭 '이청준 같은 소설가'만 작가인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패터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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