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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l 02. 2019

파란 골무 노란 연필

나의 무기, 나의 부적

뒤늦게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너목들)>를 정주행했다. 이 드라마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2013년에 왜 사람들이 '너목들', '너목들'하면서 재밌다고 입을 모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당시에는 이 드라마의 주연인 이종석과 이보영에 아예 관심이 없어서 보지 않았는데, 최근 이종석이 출연한 드라마들(<로맨스는 별책부록>, <당신이 잠든 사이에(당잠사)>, <피노키오>)을 역순으로 보다가 드디어 <너목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흔하디 흔한, 그래서 뻔하디 뻔한 법정드라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당잠사>와 <피노키오>의 극본을 집필한 박혜련 작가의 노련한 솜씨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시간순으로 보면 박혜련 작가는 <너목들>-<피노키오>-<당잠사>순으로 작품을 써 왔는데(나는 이 세 작품을 '진실 3부작'이라 부르고 싶다), 이후 작품들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주제와 소재 측면에서의) 어떤 원형이 이미 <너목들>에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너목들>에는 의미있고 재미난 장면이 많지만, 그 중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다른 법정드라마에서는 보통 클로즈업하지 않는 소품인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의미있는 소재로 활용한다. 장혜성 변호사(이보영 扮)와 차관우 변호사(윤상현 扮)는 신입 국선전담변호사이다. 장 변호사는 출근 첫날부터 국선전담변호사 사무실의 선임변호사인 신 변호사(윤주상 扮)의 심기를 건드린다. 뒤끝있는 신 변호사는 '파란 골무'를 차 변호사에게만 선물로 준다. 기록을 넘길 때 대단히 유용하다며. 파란 골무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차 변호사는 신나게 기록을 넘긴다. 와 정말 잘 넘어가네요~! 나중에는 대단히 흔하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도 연수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파란 골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기록 보려면 꼭 필요해라는 동기의 말에 연수원 교수님들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파란 골무를 500원 주고 샀었다.

[신 변호사가 파란 골무를 차 변호사의 손가락에 끼워 주고 있다]

노란 연필도 흔하디 흔한 것이다. 뒤에 빨간색 지우개가 달려 있고 몸통이 노란 스테들러 연필이다. 스테들러에서 만든 연필이니 그 품질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무튼 변호사 사무실의 회의실이나 판사실, 검사실에 가보면, 잘 깎인 노란 연필 몇 자루가 펜슬 케이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록에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메모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연필을 쓰는 것은 이해는 하지만, 왜 하나같이 이 노란 연필일까. 스테들러에서 로비를 한 것도 아닐 터인데...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장 변호사가 노란 연필을 손에 쥐고 일하고 있다]

마음씨 착한 차 변호사는 장 변호사의 첫 법정출정일에 파란 골무를 선물로 준다. 필승기원이라면서 말이다. 실제로 장 변호사는 그날 법정에서 화려하게 변론을 해서 검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놓았고, 장 변호사의 활약을 법정에서 지켜 본 차 변호사는 사무실로 돌아와 양손에 노란 연필을 쥐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장 변호사의 활약상을 신 변호사와 사무 직원에게 이야기한다. 완전 장다르크였다니까요, 장다르크! 

[차 변호사가 파란 골무를 장 변호사에게 주고 있다]
[차 변호사가 노란 연필을 양손에 쥐고 장 변호사의 활약상을 전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이 등장하는 장면이 짧았지만 강렬했던 이유는 이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이 나에게는 무기이자 부적과 같은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소송은 싸움이다. 과장이나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민사소송법도 소송이 싸움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공격 또는 방어의 방법은 소송의 정도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제출"하여야 하고(민사소송법 제146조-적시제출주의), 적시제출주의를 어기어 공격 또는 방어의 방법을 뒤늦게 제출하면 법원은 이를 받아주지 아니하고 각하할 수 있다(민사소송법 제149조-실기한 공격방어방법의 각하). 따라서 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은 원고의 공격과 피고의 방어가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싸움터인 것이다. 


나는 기록을 넘길 때뿐만 아니라 서면을 쓸 때도 파란 골무를 낀다. 파란 골무를 끼고 노란 연필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서면이 술술 풀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습관이 되어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파란 골무를 끼고 있다. 여름에는 땀이 차고 그래서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손에 끼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사무실 책상 위에도 집 책상 위에도 필통 안에도 책가방 안에도 항상 파란 골무가 두 개 이상 놓여 있다. 노란 연필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니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은 소송이라는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싸움을 벌이는 법정에서도 늘 나와 함께 하는 무기이자 부적인 것이다.


누군가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소송을 통한 공방이 진실을 발견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지하고 엄숙한 행위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소송을 통해 종국적으로 도달한 결론인 판결이 항상 진실이고 정의인 것은 아니다. 판결에 내재된 진실은 법적 진실일 뿐이고(진실은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정의는 기껏해야 합의된 정의일 뿐이다. 그러니 심각할 필요가 없다. 소송의 본질은, 요한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했듯이, 오히려 승패가 중요한 싸움이나 경기(게임)에 가깝다. 이기는 것이 정의이고, 이기는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송에는 분명 진실 발견, 정의 실현, 싸움이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기는 것이 진실(정의)이 되는 싸움보다는 기왕이면 진실(정의)이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싸움의 과정에는 항상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이 함께 할 것이다. 파란 골무와 노란 연필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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