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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l 08. 2019

아내와 술을 마시다

여름밤 아내와 마신 소주 칵테일

지난주 토요일 저녁 아내와 술을 마셨다. 집에서 아내와 술을 마신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글까지 쓰나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대단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함 일상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고 이벤트다. 하나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애 시절 초반, 기분 내자고 오뎅탕에 소주 반 잔 마시고는 심장이 관자놀이에서 뛴다고 웅얼웅얼하면서 술집 테이블에 쓰러져 잠든 아내를 본 이후로, 1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내 기억에) 단 한 번도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술을 마시자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끔 혼자 집에서 내가 맥주를 마실 때 한 모금 하고 싶다고 해도 적극 말린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마셨다가는 두통이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아내가 2주 전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와서는 이제 자기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술을 한 잔 했는데 멀쩡하다면서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 술이 무엇인지 물으니 바로 '일품진로'였다. 



일품진로는 도수가 25도로 일반 소주에 비해서는 꽤 독하다. 그래서 아내가 마신 술집에서는 일품진로를 소주잔으로 한 잔에 토닉워터를 서너배 가량 넣어서 희석시키고, 거기에 얼음을 채우고 레몬즙을 뿌려서 만든 '소주칵테일'을 팔고 있었다한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보았고, 더운 여름 토요일 밤, 구운 한치와 치즈를 안주 삼아 실로 오랜만에 함께 술을 마시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품진로소주는 일반 소주에 비해 향이 좋았다. 향긋했고 풍미가 있었다. 거기에 토닉워터를 섞고, 레몬즙을 뿌리니 사이다 맛이 나기도 했다. 얼음을 넣었으니 더운 날 시원한 음료수로 마시기 좋았다. 다행히 아내도 얼굴이 조금 빨개진 것 외에는 속이 안 좋아진다거나 심장이 관자놀이에서 뛰는 부작용 없이 즐겁게 한 잔을 끝까지 마실 수 있었다.




술이라면 맥주 내지는 쏘맥(쏘맥은 당연히 '카스처럼'이다)만 마시는지라 '일품진로소주'는 처음 듣는 술이었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꽤 재미난 사연이 있는 술이었다. 


2005년 진로를 인수한 하이트는 예상치 못한 고민에 빠졌다. 이천공장 한쪽에 쌓여 있는 수천 개의 오크통 때문이었다. 오크통에 담긴 것은 약 10년간 숙성한 증류소주. 진로가 1997년 경영난에 빠지기 직전 담가놓은 것이었다. 1년간 숙성해 프리미엄 희석식 소주에 블렌딩하는 용도로 썼지만 경영악화로 제품 자체가 단종됐다. 참이슬이 비교적 잘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숙성된 증류원액은 별 쓸모가 없었다. 창고에 쌓인 오크통 처리를 고심하던 하이트진로는 2007년 일품진로를 출시했다. 희석식 소주(주정에 감미료 등을 넣어 희석)가 주를 이루던 시장에 10년 이상 숙성한 증류식 소주라는 파격적인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어떻게든 재고를 처리해보기 위한 시도였다. 시장에선 ‘이제까지 없던 소주’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40도가 넘는 위스키와 20도가 안 되는 소주 사이의 도수(당시 23도)도 어중간했고, 가격(출고가 기준 9400원)도 일반 소주보다 무려 10배 이상 비쌌다. 2010년 이후 프리미엄 소주 시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것을 찾았다. 하이트진로는 2013년 25도로 도수를 높여 새롭게 일품진로를 내놨다. 판매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판매량이 2014년엔 전년보다 두 배, 2015년엔 세 배 늘었다. 2016년과 지난해에도 40%가량 성장했다. 2013년 이후 연평균 성장률은 83.2%에 달했다.(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18022765921)


이제 일품진로소주는 물량이 달려서 마트판매는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10년 이상 숙성한 증류원액이 턱없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2014년에 새롭게 오크통에 증류원액이 들어 갔으니 2024년에나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애물단지 처치곤란이었던 오크통 속 증류원액이 일품으로 화려하게 탄생한 것이었다. 발상의 전환이고, 창조적 변용이다.


그렇다면 내가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산 저 사진 속의 일품진로소주는 무엇인가? 나는 사실 내가 마신 일품진로소주가 기사 속 일품진로소주인 줄 알았다. 구하기 어렵다는데 마트에 갔더니 몇 병이 있어서, 속으로 '오 운이 좋군'하면서 두 병을 사왔는데, 그것이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산 소주는 '일품진로 1924'였고, 품귀현상을 겪고 있는 기사 속 소주는 '일품진로 10년 숙성'이었다. '일품진로 1924'는 '일품진로 10년 숙성'의 일종의 대체재인 셈이었다. '일품진로 1924'를 마시면서 '음, 역시 10년 숙성이라 향이 좋군'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 숙성이든 아니든 간에 아내가 조금이라도 마실 수 있는 술을 찾아서 뭔가 반갑고 기쁘다. 술을 '즐겁게'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인생에서 작지 않은 기쁨이니까 말이다. 일품진로소주도 두 병이나 있어서 올 여름 내내 주말 밤은 아내와 소주칵테일을 마실 수 있겠다. 소주에 토닉워터를 섞고 얼음을 채우고 레몬즙을 뿌려서 말이다.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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