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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l 10. 2019

벽문(The Door in the Wall)

H. G. 웰즈(Herbert George Wells)

서른아홉 살의 전도유망한 남자 월러스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의 어린아이였을 때 홀로 집을 빠져 나와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하얀 벽에 있는 초록색 문을 만났다. 초록색 문 위에는 진홍색의 담쟁이덩굴이 있고 문 앞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다. 담쟁이덩굴은 "맑은 햇살이 비치는 하얀 벽을 배경으로 온통 빛나는 진홍색"이었고, 나뭇잎들은 갈색이나 거무죽죽한 색이 아니라 "노랑과 초록으로 알록달록"했었다.


어린 소년은 초록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한 욕망을 느꼈다. 소년은 "초록색 문이 '탐'났으며,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소년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일생에 걸쳐 그를 사로잡았던 정원을 만난다. "그 정원에는 사람을 기뻐 들뜨게 하는 분위기, 다시 말하면 경쾌함, 행운, 유복함의 느낌을 안겨 주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그 정원에서 커다란 표범 두 마리와 뛰어 놀기도 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의 안내를 받아 정원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곳은 시원한 분수와 아름다운 것들, 소망하는 것과 그 충족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그리고 거기에는 온갖 물건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뿐이야. 그러나 이들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친절했어.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여튼 그들은 모두 무척 친절했고 내가 온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 그들의 몸짓, 부드러운 손, 환영과 사랑의 눈빛 때문에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었어.


정원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소년은 갑자기 나타난 "엄숙하고 창백한 얼굴에 꿈꾸듯 공상에 잠긴 눈을 한 침울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어떤 책을 보게 된다. 그 책은 "자기 자신에 관한 책'이었다. 그 책에는 소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겪은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등불이 켜지기 전 싸늘한 저녁 시간의 길고 어둠침침한 거리"였다. 소년은 엉엉 울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어두운 거리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두 번째로 초록 문을 만난 것은 아침에 학교 가던 길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학교에 늦지 않을 욕심에 지나쳐 간다. 학교가 끝나고 다시 그 곳을 찾아 갔으나 초록 문은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로 초록 문을 만난 것은 옥스퍼드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기 위해 마차로 패딩턴 역에 가는 도중이었다. 잠깐 마차를 세울까 고민했지만, 옥스퍼드 대학교의 장학금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마법의 정원쯤은 희생시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사랑스런 친구들, 그리고 그 맑은 분위기는 내게 몹시 아름답고 훌륭해 보였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어. 그 대신 현실에 대한 집착이 점점 강해져 갔지. 나는 다른 문, 즉 출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봤던 거야.


그 이후 그는 네 번이나 초록문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렵사리 고백하러 가는 길에, 주요 법안에 표결을 하러 달려 가는 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길에,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초록문을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그는 갈등하다가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이제 문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다시는 그 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어른이 되었고, 한 나라의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초록문과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난 비밀정원을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에 사무쳐 슬퍼하며, 때로는 거의 소리 내어 흐느끼며 홀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의 시신이 어느 지하철 역 근처의 깊은 웅덩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지하철 연장 공사를 위해 파놓은 두 개의 갱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큰길에다 널빤지로 울타리를 쳐 놓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 사는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널빤지에는 조그만 통로가 뚫려 있었다. 그 문은 양쪽 갱도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부주의로 잠그지 않은 채 내버려 둔 상태였다. 그 문으로 그는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정거장 근처의 창백한 전등불로 인해 거친 널빤지를
하얀 벽과 비슷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그 잠기지 않은 운명적인 문이 그에게 어떤 추억을 일깨웠던 것일까?




초록문 너머의 세계는 인류가 오래 전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이상향을 상징할 수도 있다. 빈곤과 기아, 전쟁과 살육, 투쟁과 갈등, 결핍과 불만이 없고, 평화와 행복, 사랑과 자유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아니면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주인공 소년이 엄마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면서 꾼 길고도 긴 백일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어떤 기회-인생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다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를 뜻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어느 때인가는 초록문을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초록문인 줄 모르고 지나친 적도 있을 것이고, 초록문이라는 것은 알아보았지만 당장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붙잡기 위해 초록문을 여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리 초록문을 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약간은 소심하고 약간은 비겁한 생각이지만, 초록문 너머 무엇이 있는 줄 모른다면 후회할 일도 없고, 체념과 포기도 쉬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초록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면서 그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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