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서머싯 몸
최근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392번과 393번으로 윌리엄 서머싯 몸의 단편선이 출간되었다. 서머싯 몸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추석 연휴에 느긋하게 즐길 요량으로 이 두 권의 책을 394번으로 출간된 <케이크와 맥주>(<과자와 맥주>라는 제목이 더 익숙하다)와 더불어 구입했다.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인간의 굴레에서> 등 그의 장편을 읽어 본 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그의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다. 그는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이론이나 주의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 놓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 오로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그는 전형적인 그리고 진짜 소설가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장편 못지않게 단편도 재미가 있다. 반복적으로 아껴 읽고 있는 <서밍업>에서 알게 된 그의 신조, 사상, 관심이 장편에 비해서 단편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체현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재미도 작지 않다. 그가 <서밍업>에서 밝히고 있는-소설가의 영업비밀이라 할-소설 작법 이론이 단편에서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다 떠나서 서머싯 몸의 글을 하나라도 더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이다.
<개미와 베짱이>
조지는 성실한 변호사이고, 그의 동생 톰은 어느 집안에나 한 명쯤은 있는 사고뭉치이고 내놓은 자식이다. 톰은 성인이 된 후 이십년 동안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다녔고(심지어 조지를 상대로 사기를 치기도 했다), 그 뒷치닥거리는 변호사인 조지가 도맡아 했다. 요컨대 톰은 "게으르고 무가치하며 방종하고 수치스러운 종자"다. 반면 조지는 평생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 살아 왔다. 평생 일해서 3만 파운드의 돈을 모았고, 은퇴 후 국채에서 나오는 작은 수입으로 평온하게 살아 갈 기대를 하고 있는 소시민이다.
그런데 톰은 어머니뻘 되는 여자와 약혼을 했고, 마침(?) 그 여자가 죽으면서 톰에게 전 재산을 남겨준다. 자그마치 50만 파운드와 요트 한 대, 런던의 집 한 채, 전원주택 한 채를. 조지는 절규한다.
이건 불공평해. 정말이지, 이건 불공평해. 망할, 이건 불공평하다고.
<삶의 진실들>
쾌활하고 건강하며 돈도 많은 헨리 가닛이 오늘은 저기압이다. 친구들이 이유가 뭔지를 묻는다. 아주 난처한 입장이라며 친구들의 조언을 구한다. 헨리에게는 니키라는 열여덟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바로 그 "빌어먹을 아들놈 문제"라는 것이다.
니키는 캠브리지 대학의 테니스 선수인데, 대회 참가를 위해 몬테카를로에 간다. 대회가 끝나고, 니키는 그곳에서 카지노에 가게 된다. 구경을 하러 간 것이지 처음부터 도박을 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지엄한 당부 때문이었다. 아버지 헨리는 유흥과 환락의 도시 몬테카를로에 어린 아들을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세 가지 당부를 한다. 도박하지 말 것. 아무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말 것. 여자와 엮이지 말 것.
그러나 부모 말 듣는 자식이 어디 있는가. 어쩌다보니 니키는 도박을 하게 되었고, 초심자의 행운때문인지 돈도 많이 땄고, 돈을 노리고 접근한 여자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여자는 니키의 돈을 훔치려 하지만, 또 어쩌다보니 니키가 자신이 도박에서 딴 돈에 더해서 여자의 돈까지 수중에 넣게 된다.
아버지 헨리의 고민은 이제 아들 니키가 자신을 잔소리나 해대는 늙은 바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력이나 노력을 하지 않고 요행만을 믿다가 아들의 인생이 망가질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헨리에게 변호사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헨리, 나라면 걱정하지 않겠어. 내가 보기에 당신 아들은 복을 타고 태어났어. 길게 보면 그게 똑똑하거나 부유하게 태어난 것보다 낫지 않은가.
나는 노력보다는 운명을 믿는 편이다. 노력할 수 있다는 것도 운이다. 노력으로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정해진 운명 안에서 노력할 뿐이다. 조지의 절규도 이해가 되고, 헨리의 고민도 공감이 된다. 그러나 톰의 운과 헨리의 복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타고 난 것이다. 서머싯 몸은 어쩌면 이게 복잡한 삶의 간단한 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