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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ul 18. 2019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할 이중잣대

드라마 <보좌관>을 보고나서

드라마 <보좌관>이 시즌2를 예고하면서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10회라는 길지 않은 분량에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판치는 현실 정치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겨 넣으면서 매회 높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밀도 높고 임팩트있는 장면들이 많았던 것이다. 드라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송희섭 의원을 연기한 배우 김갑수는 당장 국회로 입성시켜도 될만큼 노회하고 탐욕스러운 정치인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렸다(도대체 김갑수는 왜 이제까지 착하고 약한 역할을 한 것일까).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이성민 의원을 연기한 배우 정진영은 이제까지 보여 준 것과 비슷한 이미지로 평면적인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이라는 캐릭터의 진정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정재는, 영화 <신세계>의 이자성이 그러했듯이,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태준이라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이 드라마는 두 가지의 큰 생각거리를 던진다. 하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진보 정치인과 소위 보수 정치인을 바라보는 이중잣대가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이중잣대는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따라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인데, 좋은 정치인을 옭아매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내몬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왜곡된 기준이다.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송희섭의 길 VS 이성민의 길


송희섭 의원에게 정치란 곧 힘을 가지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어떤 이념이나 신념은 필요하지 않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은 기본이고, 때로 그 술수와 모략이 범죄행위가 됨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다. 힘을 얻기 위해 검은 돈도 서슴없이 이용한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힘 자체가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그 힘의 목표-그 힘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패도정치다.


이성민 의원에게 정치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법보다 사람이 먼저다. 한때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장태준(이정재 분)에게 항상 사람을 보면서 정치할 것을 주문한다.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람이 먼저다.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대변하는 것이 정치인의 소임인 것이다. 그가 힘을 가지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왕도정치다.


송희섭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이성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서 어쩌면 당연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한때 이성민 의원의 보좌관이자 정치적 동지였으나, 현재 송희섭 의원의 보좌관인 장태준은 송희섭의 길과 이성민의 길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의 목표(현실적 목표)는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즉 현실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 힘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것(궁극적 목표)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현실적 목표와 궁극적 목표 사이의 괴리는 크다. 현실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순간순간 궁극적 목표를 유보하거나 희생시켜야 한다. 그래서 장태준은 송희섭의 길과 이성민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을 벗어난) 불가피한 상황에 의한 것이다. 장태준은 사람을 보지 말고 상황을 보라고 말하지만, 바로 그 상황이 장태준을 종국에는 헤어나기 어려운 궁지로 몰아간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용인되기 어려운 극단적인 수단마저 사용한다.


송희섭과 이성민은 흔들리지 않는다. 송희섭의 목적은 오로지 힘을 얻는 것이고, 이성민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 둘의 내면에는 어떤 불일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목적은 하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태준은 흔들린다. 그의 내면은 현실적 목표(현실)와 궁극적 목표(이상)로 분열되어 있다. 이런 분열증을 겪는 자만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수단이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정당화는 '좋은 정치'의 뒷받침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결국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이 배분은 사회적 효용의 총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지 않을까. 좋은 정치란 다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 아닐까. 힘을 가진 소수가 불만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할 이중잣대


우리는 진보 정치인에게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그 엄격함은 진보 정치인의 (상대적으로) 사소한 윤리적 결함에 목소리를 높인다. 깨끗한 척은 다하더니 뒤로는 호박씨를 깠다고 비아냥거린다. 언론은 사소한 결함을 거침없이 부풀린다. 가진 것이라고는 '깨끗함'이 전부인 놈들이 나쁜 짓 했다고 비난한다. 양심적인 진보 정치인은 스스로 견디지 못한다.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정치를 그만 둔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정치사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두 명의 좋은 정치인을 어이없이 잃었다. 


우리는 보수정치인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들은 으레 성적으로 문란하고, 자기 돈인 양 남의 돈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이유없이 죽은 국가적 재난 사태에 대해서 공감할 줄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들의 정치생명줄을 끊지는 않는다. 진보 정치인이 최소한의 '깨끗함'을 가지고 있다면, 보수 정치인은 그 최소한의 것마저 없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깨끗함'을 가지고 있는 쪽이 더 나은 것 아닐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최소한의 '깨끗함'을 가지고 있는 쪽에 대해서 더욱 엄혹하다. 이 불균형한 이중적 태도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장태준은 몇억 몇십억 받은 놈들은 아무 문제없이 떵떵거리며 국회의사당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고작 5천만 원 받은 것이 무슨 문제냐고 절규한다. 그러게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왜 '더 나쁜' 짓 한 놈들에게는 아무 소리 하지 않으면서 '덜 나쁜' 짓 한 자들에게는 가혹한 비난을 퍼붓는 것일까? 정치인을 바라보는 이 왜곡되고 이중적인 판단 기준은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정치인을 평가할 때 이런 전근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들이대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나마 이 판단 기준을 불균형하게 들이대는 것이 더욱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태준은 송희섭의 길과 이성민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현실적 목표를 이룬다. 장태준은 '송희섭의 길'과 '이성민의 길'을 안일하게 절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느 한 쪽의 길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과연 그가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시즌2가 기대되는 이유다.



*사진출처-드라마 <보좌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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