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돌아보는 나의 서른
아마도 2020년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는 넷플릭스 드라마 <겨우, 서른>으로 기억될 것 같다. 중국 영화나 홍콩 영화는 많이 보았지만, 중국드라마는 처음이다. 큰 기대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놀랍도록 재밌었고, 몰입감이 대단히 높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온통 이 드라마에 바칠 만했고, 총 43부인 드라마가 끝나는 것이 무척 아쉬울 정도였다.
다 본 뒤로도 시즌2는 언제 나오나 찾아보게 되고, 우리의 주인공들인 구자, 만니, 샤오친이 잘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는 '우리의 주인공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 등장인물들에게 애정이 간다.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높을수록, 즉 마치 그 캐릭터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수록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것 같다. 그래서 잘 만든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 속에 특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사실 잘 만든 비전형적인 캐릭터조차도 '비전형의 전형성'을 구축해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 같다).
<겨우, 서른>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되듯이 드라마의 내용 또한 대단히 전형적이다. 상하이에 살고 있는 이제 서른이 된 세 명의 여성이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된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이 결혼과 이혼, 사랑과 배신,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한뼘 성장해 나간다. 약간의 계몽주의가 살짝 거슬리기는 했지만(물론 계몽주의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낯간지러운 감성팔이나 억지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마흔이 조금 넘은 지금 <겨우, 서른>을 보면서 나의 '서른'을 떠올려 보았다. 20대 때는 불확실한 미래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면, 서른이 되었을 때는 지금이 나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아닌가 싶어서 괴로워하며 발버둥쳤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게 된 직장에 그대로 계속 다닐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도전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서른'을 지나면 기존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뭔가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고 싶다면, '서른'은 그리 나쁘지 않은 나이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은 일이 있다면, '서른'에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나의 서른 살 생일에 집사람이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양갱케이크였는데, 그 안에 팥으로 '三十而立'(삼십이립)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 케이크를 먹으며 집사람과 한 얘기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사표를 냈고, 신림동에 가서 법전과 민법책을 샀다.
다니던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더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줬을지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한 것이 더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인생은 끝까지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변호사로 살(아남)기 위해서 이미 포기한 것도 많다. 인생의 대차대조표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서른'에 직장을 그만둔 그 선택 자체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내 나이 육십이 되면, '겨우, 쉰'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오십이라는 나이도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육십이 돼서 '아 하고 싶었던 그 일을 오십부터라도 할 걸'하는 후회를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해야겠다. 정말 뻔한 소리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 오는 것이니까. 그리고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니까.
이제 서른이 된 우리의 상하이 친구들은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겠지. 구자는 차(茶) 밭에서 계속 일하며 차 전문가가 되어 차 공장을 잘 운영하고 있을 것이고, 샤오친은 두 번째 소설을 열심히 재미나게 쓰고 있을 것이다. 만니는 스코틀랜드 유학을 잘 마치고 왔을까. 만니는 늘 적극적으로 열심히 배우려고 하니까 뭐든 잘 하고 있을 텐데...원하는 좋은 남자를 만났을까. 천위는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왔을까. 쉬환산은 정신을 좀 차렸을까...구자와 아이없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천쉬는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할텐데...아, 충유빙 파는 아저씨, 아주머니...장사는 계속 잘 되고 있죠...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지만...아이가 좀 걱정이다. 그래도 잘 크겠지. 그리고 당신들을 그리워 하는 것도 올해까지만이야. 내년에는 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겠지.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고, 새해 복 많이 받아. 안녕.
[이미지 출처-Netflix 공식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