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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Sep 08. 2021

쓰러지다

아픈 허리와 걷다 #001

2021년 4월 8일, 나는 쓰러졌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가다가 허리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눈앞에서 번개가 친 것처럼 짧은 순간 빛이 번쩍했다. 단말마, 그러니까 인간이 죽을 때 느끼는 최후의 고통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극심한 통증 때문에 짧지만 강렬하게 무서울 정도로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나는 그렇게 화장실 앞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얼굴을 찡그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아내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간신히 대답했다. 아내는 장난치지 말라고 하면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내가 갑자기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는 장난을 자주 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장난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20분 정도 누워 있었을까, 차도는 전혀 없었다. 허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결국 아내는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대원 세 분이 10분이 채 되지 않아 오셨다. 세 분 중 팀장으로 보이는 여성 구급대원이 나에게 어떤 상황이냐고 물었고, 나는 힘겹게 고통을 참아가며 쓰러진 경위와 통증, 현재의 상태를 간략하게 말씀드렸다. 얘기를 다 들으신 팀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화장실 앞에 누워 계시죠?"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 웃음이 나왔고, 웃음을 참느라 다시 고통과 싸워야 했다. 말씀드렸잖아요,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쓰러졌다고. 그리고 움직이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다고요.


구급대원 분들이 나를 들어 들것에 싣는 과정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극심한 통증을 참기 입을 앙 다물어야 했다. 들것에 싣는 과정에서 내 발이 들것 밖으로 삐져나왔고, 팀장님은 다시 한번 큰 웃음을 주셨다. "왜 이렇게 키가 크신 거예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키가 커서 죄송합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낳아 주셔서 그럴 수도 있고, 중학생 때 치킨을 많이 먹어서 성장촉진제를 다량 섭취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생각했다. 들것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급차에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5층이나 4층에서 나처럼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를 어떻게 옮기는지 슬쩍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구급대원이 업고 내려오는 것일까.


말 그대로 난생처음 구급차를 타보는 것이었다. 구급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구급대원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전화 한 통에 세 명의 구급대원이 달려와 아픈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주는 것이다. 안전하고, 신속하게. 게다가 구급대원들은 친절했고, 업무에 능숙했고, 심지어 (몹쓸) 유머까지 갖췄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낸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국가다. 전화 한 통으로 신속하게 아픈 사람을, 사회적 약자를,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조해 줄 수 있는 능력과 시스템을 갖춘 기구가 국가다. 가진 자들일수록 세금을 내기를 꺼려한다. 고액의 세금 앞에서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는데?"라며 툴툴대기도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국가는 가진 자에게 해준 게 많다. 국가가 만들어 놓은 인프라와 시스템이 없었다면, 가진 자의 능력만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게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집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지만, 팀장님은 대학병원으로 가게 되면 사람이 많아서 바로 응급 처치를 받기 어려우니 응급실이 있는 적절한 규모의 병원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였다. 대학병원보다 집에서 거리는 조금 더 멀지만 중형급의 병원 응급실로 가서 나는 대기 없이 곧바로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 응급실은 의외로 한산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아내는 응급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응급실 문 밖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팔에 바늘을 꽂고 진통제를 맞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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