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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Sep 09. 2021

응급실에서

아픈 허리와 걷다 #002

응급실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20 병상 정도 되어 보이는 응급실에 환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 정도였다. 전화벨 소리와 데스크 담당 간호사가 통화하는 목소리가 응급실의 정적을 간헐적으로 깨뜨릴 뿐이었다(그나저나 생각보다 병원에 전화가 많이 걸려 오는 것 같았다. 누가 병원에 전화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픈 사람이 전화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응급실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피칠갑을 한 사람들, 곧 사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하게 아파 보이는 사람들,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얘기다.


조용한 응급실 침대에 누워 진통제와 소염제를 다 맞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몸을 살짝 움직여 허리 통증이 가라앉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그마저도 여전한 통증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원래 자세를 유지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누워 있으니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기어 나왔다. 나는 어디가 아픈 걸까? 허리 디스크일까? 수술을 해야 되는 것일까? 수술하지 않고 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아팠을까? 이 주사를 다 맞으면 통증은 사라지는 것일까?


사실 허리 통증이 왔을 때, 나는 (화장실 앞에 누워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23년 전에 이미 허리디스크(요추 4번-5번) 절제술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의자에 오래 앉아 있거나 가방을 무겁게 메고 다니면 하루 이틀 정도 허리가 아프기도 했고, 특히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어느 날인가는 허리 통증 때문에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4월 8일 아침 쓰러지기 2-3개월 전부터 몸이 계속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통증 때문에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책상을 짚거나 의자 손잡이를 짚고 일어나야 했다. 걸을 때도 뭔가 불편한 느낌 내지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다리에 힘이 빠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몸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라. 밖으로 나가서 운동해라. 그런데 나는 이 모든 신호를 무시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있었고,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쓰러지기 전날인 4월 7일에는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를 마치고 엄마 집에 가서 형을 만나 술을 한 잔 하기도 했다. 엄마 집 가는 길에도 허리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걷는 것이 많이 힘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오랜만에 형을 만나 술 한 잔 한다는 생각에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갔다. 바닥에 앉기는 이미 어려운 상태였고,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개표 방송을 보면서 몇 시간에 걸쳐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밤 자면서 내가 몸을 많이 뒤척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술을 안 마신 상태였다면 통증을 느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다음 날 아침 무방비 상태에서 허리 통증의 습격을 받아 화장실 앞에서 쓰러지는 비참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이 이렇게 무섭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진통제와 소염제를 다 맞을 수 있었다. 응급실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 이제 집에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가실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는데, 아침의 통증이 그대로 몰려왔다. 진통제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느낌이었다. 진통제를 하나 더 달라고 부탁했다. 의사 선생님은 진통제 하나 더 맞는다고 오늘 집으로 가실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이런 식으로 응급실 오신 분들은 1주에서 2주 정도 입원해서 절대 안정을 취한 이후 퇴원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절망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아내와 식사를 하고 싶었다. 아내와 평소 하듯이 끝도 없이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싶었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싶었다. 과자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일을 하고 싶었다. 요컨대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의사 말이 틀렸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경험 과학의 오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진통제 한 팩만 더 맞으면 집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가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사이 1시간이 지났고, 두 번째 진통제를 다 맞았다.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놀랍게도 통증이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아내의 부축을 받아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키는 동시에 역시 조심스럽게 하체를 돌려 침대에서 내려왔다. 응급실 의사 선생님은 적어도 2-3일은 입원해 계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굳이 퇴원해서 집에 가겠다는 어리석은 환자를 말릴 수는 없었다. 다만 내일 집 근처 병원에 가서 반드시 허리 MRI를 찍어 보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아내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나는 아내에게 "봤지! 다른 사람들은 1-2주 입원해 있는다고 하는데, 난 2시간 만에 걸어 나왔지. 나 대단하지!"라고 하면서 으스댔다. 이 어처구니없는 으스댐은 고통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길을 닦고 있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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